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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844
한자 郭再祐[達城郡]
영어공식명칭 Kwak Jaeu
이칭/별칭 계수,망우당,충익공,천강홍의장군,홍의장군,비장군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52년 - 곽재우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85년 - 곽재우 정시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곽재우 의병 창의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곽재우 유곡도 찰방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곽재우 형조 정랑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곽재우 조방장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93년 - 곽재우 성주 목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594년 - 곽재우 진주 목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597년 - 곽재우 방어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99년 - 곽재우 경상 좌병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00년 - 곽재우 전라도 영안군으로 유배
활동 시기/일시 1604년 - 곽재우 찰리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04년 - 곽재우 선산 부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04년 - 곽재우 용양위 부호군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05년 - 곽재우 동지중추부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05년 - 곽재우 찰리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05년 - 곽재우 한성부 우윤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06년 - 곽재우 전라 병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08년 - 곽재우 경상 좌병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09년 - 곽재우 경상 우수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10년 - 곽재우 삼도 수군통제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10년 - 곽재우 부총관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10년 - 곽재우 한성부 좌윤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10년 - 곽재우 함경도 관찰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13년 - 곽재우 전라 병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16년 - 곽재우 장예원 판결사 임명
몰년 시기/일시 1617년 - 곽재우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17년 - 곽재우 광해군 치제
추모 시기/일시 1618년 - 곽재우 충현사에 배향
추모 시기/일시 1674년 - 예연 서원 건립
추모 시기/일시 1677년 - 예연 서원 사액
추모 시기/일시 1709년 - 곽재우 병조 판서 겸 지의금부사 증직
추모 시기/일시 1709년 - 곽재우 충익 증시
추모 시기/일시 1739년 - 보덕 불망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1972년 - 망우당 공원 건립
추모 시기/일시 1972년 - 충익사 건립
출생지 곽재우 출생지 - 경상남도 의령군 세간리
거주|이주지 곽재우 거주지 - 경상남도 의령군 세간리
거주|이주지 곽재우 거주지 -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마산리
거주|이주지 곽재우 거주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가태리
거주|이주지 곽재우 이주지 - 경상북도 울진군
거주|이주지 곽재우 거주지 - 경상남도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묘소 곽재우 묘소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지도보기
성격 의병장
성별
대표 경력 함경도 관찰사

[정의]

조선 전기 경상도 현풍현 출신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諡號)는 충익(忠翼)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현감(縣監)을 지낸 곽위(郭瑋)이며, 할아버지는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을 지낸 곽지번(郭之蕃)이다. 아버지는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지낸 곽월(郭越), 어머니는 목사(牧使)를 지낸 강응두(姜應斗)의 딸 진주 강씨(晉州姜氏)와 참봉(參奉)을 지낸 허경(許瓊)의 딸 김해 허씨(金海許氏)인데, 곽재우는 진주 강씨의 소생이다. 곽재우의 부인은 만호(萬戶)를 지낸 김행(金行)의 딸 정부인 상산 김씨(商山金氏)이다.

[활동 사항]

곽재우(郭再祐)[1552~1617]는 1552년(명종 7) 경상도 의령현(宜寧縣) 세간리(世干里)[지금의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서 출생하였다. 세간리는 곽재우의 외가가 있는 곳으로, 원래 곽재우의 선대는 경상도 현풍현 솔례리(率禮里)[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대리]에 세거해 왔다. 곽재우는 어려서부터 기량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독서를 즐겼다고 한다. 1569년(명종 22) 의령현 세간리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는데, 공부를 하다 여가가 생기면 활쏘기와 말타기를 하거나 병서(兵書)를 익혔다. 1574년(선조 7) 의주 목사(義州牧使)로 부임한 아버지 곽월을 따라 2년 간 배행하였으며, 1578년(선조 11)에는 동지사(冬至使)로 임명된 아버지와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그곳에서 관상 보는 사람이 곽재우를 보고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되어 천하에 이름을 떨칠 것이라 하였다.

1585년(선조 18) 34세의 나이로 정시(庭試)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답안으로 제출한 「당 태종 교사 전정론(唐太宗敎射殿庭論)」이 문제가 되어 급제가 취소되었다. 임금도 문무를 겸비해야 된다는 표현이 선조의 뜻을 거슬렀기 때문이다. 1586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묘소가 위치한 신당동(新堂洞)[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에서 여묘 살이를 하였다. 1589년 상사(喪事)가 끝난 뒤에는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의령현의 기강(岐江) 돈지(遯池)[지금의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마산리]에 정자를 짓고 한평생을 보낼 계획을 세웠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즉시 사재를 털어 장사들을 모집한 뒤 의병을 일으켰다. 곽재우는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이름 짓고 위엄을 보이었다. 곽재우는 우선 의령현의 신번현(新繁縣)[지금의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일대]을 왜적으로부터 지켰으며, 이후 연전연승하였다. 곽재우는 처음 의병을 일으켰을 때 군사가 적었으므로, 매복전을 통해 왜적을 물리치니, 이들이 곽재우를 비장군(飛將軍)이라 불렀다. 특히 곽재우는 1592년에 정암진(鼎巖津)[경상남도 의령군] 전투와 제1차 진주성(晉州城) 전투에서 승리하여, 전라도를 수호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한편,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김수(金睟)가 근왕(勤王)을 핑계로 달아나려 하자, 곽재우는 김수를 참해야 한다는 격문을 돌린 뒤 조정에 상소문을 올렸다. 김수도 이에 맞서 곽재우가 역심을 품었다고 고하였는데, 경상우도 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이 편지를 보내 곽재우를 책망하고 반역과 순종의 뜻을 깨우치게 하였다. 그리고 조정에 곽재우의 공과 진상을 보고하니, 특별히 유시를 내려 포상하고 유곡도 찰방(幽谷道察訪)에 임명하였다.

전세가 지속되는 동안 현풍(玄風)·고령(高靈)·창녕(昌寧)에 주둔한 왜적들이 이곳의 곡식을 모두 불태우고 도망갔으나, 오직 곽재우가 지키고 있던 강우(江右)만은 무사하였다. 이를 안 선조는 1592년 8월 곽재우의 관직을 형조 정랑(刑曹正郞)으로 높여 주었다. 이어 10월에는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라 조방장(助防將)에 임명되었다. 1593년(선조 26)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부임하였는데, 성주목 팔거현(八莒縣)[지금의 경상북도 칠곡군 일대]에 명나라 총병(摠兵) 유정(劉綎)이 주둔하자 이습 영장(肄習領將)이 되어 왕래하였다. 1594년 성주 목사로 있으면서 조방장을 겸직하였고, 이어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관직을 그만두었으며, 1596년에는 현풍현 가태리(嘉泰里)[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가태리]에 머물렀다. 1597년 곽재우는 방어사(防禦使)에 임명되어, 현풍현석문산성(石文山城)을 새로 쌓았다. 그러나 정유재란이 일어나 미처 구축을 이루지 못하고, 창녕현(昌寧縣)의 화왕산성으로 옮겨 굳게 지켰다. 그해 8월 어머니 김해 허씨가 세상을 떠나자 현풍현 가태리에 장사 지낸 후, 강원도 울진현(蔚珍縣)[지금의 경상북도 울진군]에서 지냈다. 이후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1599년(선조 32) 10월, 전란이 끝난 뒤 곽재우는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에 임명되었다. 재임 중 도산성(島山城) 수축을 계청(啓請)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대사헌(大司憲) 홍여순(洪汝諄)이 왕을 업신여기는 행위라고 탄핵하여, 1600년 전라도 영암군(靈巖郡)으로 유배를 갔다. 1년 만에 귀양지에서 석방된 곽재우는 1602년 경상도 영산현(靈山縣) 창암(滄巖)[지금의 경상남도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강가에 정자를 짓고 ‘망우(忘憂)’라고 이름을 붙였다. 1604년 찰리사(察里使)가 되어 천생산성(天生山城)[경상북도 구미시 장천면 신장리 위치]을 수축하였다. 그해 5월 선산 부사(善山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병환으로 찰리사도 사직하였다. 11월 용양위 상호군(龍驤衛上護軍)으로 승급하였다. 1605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으며, 찰리사에 재차 임명되었다. 곧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으나, 병환으로 사직하고 창암으로 돌아왔다. 1606년 전라 병사(全羅兵使)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07년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이 곽재우를 내방하였는데, 이해 5월 대간들에게 도류(道流)를 창도한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다.

1608년(광해군 즉위) 경상 좌병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해 9월 법에 따라 임해군(臨海君)을 처벌하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1609년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 1610년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광해군이 계속 불러 올려, 그해 여름 서울에 가서 부총관(副摠管),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이때 상신(相臣)을 지낸 이원익(李元翼)도 두문불출하자, 세 번의 상소문을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광해군은 선전관(宣傳官)을 보내 곽재우를 다시 부르려 했으나, 병환을 이유로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1612년 정인홍(鄭仁弘)이 곽재우의 등용을 건의하였고, 1613년 전라 병사(全羅兵使)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때 광해군이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처벌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린 뒤 사직하였다. 1616년 장예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17년 세상을 떠났는데, 광해군이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5권 3책의 『망우집(忘憂集)』이 전한다. 문집에는 곽재우가 올린 여러 편의 상소가 수록되어 있어, 당시의 정세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묘소]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에 묘소가 위치해 있다.

[상훈과 추모]

1618년(광해군 10) 경상도 현풍현에 곽재우를 배향하는 충현사(忠賢祠)가 세워졌다. 1674년(현종 15) 현풍 현감(玄風縣監) 유천지(柳川之)가 충현사를 확장하여 서원을 건립하였는데, 이 서원은 1677년(숙종 3) 예연 서원(禮淵書院)[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가태리 위치]으로 사액(賜額)되었다. 1709년(숙종 35) 병조 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에 증직(贈職)되고, ‘충익(忠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739년(영조 15) 경상도 의령현의 백성들이 곽재우의 첫 승전지인 기강 강변에 보덕 불망비(報德不忘碑)[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를 세웠다. 1972년에는 곽재우를 기리는 망우당 공원[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과 수성구 만촌동 일대 위치]과 충익사(忠翼祠)[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 중동리 위치]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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