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711
한자 李承曾
영어공식명칭 Lee Seungjeung
이칭/별칭 희로(希魯),백순(伯純),관란(觀瀾)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15년연표보기 - 이승증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58년 - 이승증 생원시 합격
활동 시기/일시 1560년 - 이승증 건원릉참봉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85년 - 이승증 사도시직장 제수
몰년 시기/일시 1599년연표보기 - 이승증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17년 - 이승증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수록
출생지 이승증 출생지 - 경상북도 경주시
거주|이주지 이승증 이거지 -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미산리 지도보기
묘소 이승증 묘소 -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지도보기
성격 학자
성별
대표 경력 생원

[정의]

조선 전기 경상북도 경산 지역에 은거한 학자.

[개설]

이승증(李承曾)[1515~1599]은 자인에 삼회당(三會堂)을 짓고 은거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창의를 독촉하는 격문을 썼다.

[가계]

이승증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희로(希魯)·백순(伯純), 호는 관란(觀瀾)이다. 아버지는 참봉(參奉)을 지낸 이계간(李季榦), 어머니는 직장(直長)을 지낸 김치도(金致道)의 딸 김씨(金氏), 할아버지는 첨정(僉正)을 지낸 이철동(李哲仝), 증조할아버지는 훈련참군(訓鍊參軍)을 지낸 이윤흥(李允興)이며, 부인은 경주 김씨(慶州金氏)이다.

[활동 사항]

이승증은 1515년(중종 10) 경주부 중리(中里)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천성이 아름다웠으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버이가 상을 당했을 때에는 극진으로 시묘살이를 했기에 도적들도 감동을 받아 감히 여막을 침범하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에 경상도 관찰사가 장계를 올려 정려를 받기도 했다. 김대유(金大有)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558년(명종 13)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560년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 1562년 사옹원제거(司饔院提擧), 1564년 상의원별제(尙衣院別提), 1572년(선조 5) 상서원직장(尙瑞院直長), 1580년 종부시전첨(宗簿寺典籤), 1585년 사도시직장(司䆃寺直長)에 차례로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은 채 자인 금학산(金鶴山)에 은거하였다. 이승증은 이곳에 ‘삼회당(三會堂)’이라는 서당을 지었으며, 그 남쪽에는 ‘어초와(漁樵窩)’라는 소실(小室)을 세웠다. 또한 두 개의 대(臺)를 축조했는데, 하나는 맹구대(盟鷗臺), 나머지 하나는 이승증이 자호로 쓴 관란대(觀瀾臺)이다. 이후 수 백 명에 이르는 선비들이 찾아와 이승증과 이곳에서 강론했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최동보(崔東輔)·최여호(崔汝琥)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자인 지역을 방어하였다. 나아가 대구 사림에게 격문을 보내 창의를 도모하기도 했다.

[저술 및 작품]

이승증의 문집으로 4권 2책의 『관란집(觀瀾集)』이 전한다. 문집에는 이승증이 지은 시문 32수, 논(論) 3편, 「통대구사림문(通大邱士林文)」이 수록되어 있다.

[묘소]

이승증의 묘소는 경상북도 경산시 금학산 아래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17년(광해군 9)에 편찬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의 「승증여묘(承曾廬墓)」 편에는 이승증의 여묘살이와 효행이 소개되어 있다. 이승증 사후 사림들이 자인의 별업(別業)에 원우(院宇)를 짓고자 하였다. 사당은 완성되었지만 이때는 자인이 복현(復縣)되어 경주와 별개의 고을이 된 후였기에 이승증을 제향하는 원우 설립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1659년(현종 10) 이승증이 은거했던 곳에다가 그의 호를 딴 관란서원(觀瀾書院)[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서원천로 268-21]을 짓고, 이언적(李彦迪)을 제향하였다. 이승증은 경주 문호사(汶湖祠)[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첨성로 160-8 소재]에 제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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