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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654
한자 義兵
영어공식명칭 Righteous Army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박철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5~1986년 - 을미의병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5~1906년 - 을사의병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7~1910년 - 정미의병

[정의]

개항기 경기도 화성 지역 일대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전개한 무력 항쟁.

[개설]

청일전쟁[1894~1895]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 침략을 본격화하였다. 한국인의 자립권과 생존권이 위협에 놓인 상황에서, 한국인들은 자발적으로 무장하여 외세를 쫒고 나라의 주권을 지키고자 하였다. 한말 영국 기자 매캔지[Frederick Arthur Mckenzie]는 『자유를 위한 한국의 투쟁[Korea's The Fight For Freedom]』에서 의병을 '정의군'[Righteous Army]이라 하였으며, 박은식(朴殷植)은『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의병(義兵)이란 민군(民軍)이다. 국가가 위급할 때 즉각 의(義)로서 분기(奮起)하여 조정(朝廷)의 징발령(徵發令)을 기다리지 않고 종군(從軍)하여 적개(敵愾)하는 자'로 정의하였다.

한말 의병 전쟁은 크게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뒤이은 김홍집(金弘集)[1842~1896] 내각의 단발령에 저항하여 일어난 을미의병(乙未義兵)[1895~1986년], 을사조약 등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여 발생한 을사의병(乙巳義兵)[1905~1906년], 고종 강제 퇴위·정미칠조약 체결·군대 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한 정미의병(丁未義兵)[1907~1910년] 등 3개 단계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한말 화성 지역에서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의병들이 일어나 활동하였다.

[을미의병]

1895년 10월 8일 일본 정부의 지시와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1847~1926]의 주도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뒤이어 황후폐위조칙이 발표되자, 10월 10일 분개한 유생들에 의해 서울 창의소(倡義所)에 고시문이 붙기 시작하였고, 11월에는 대전 유성에서 문석봉(文錫鳳)[1851~1896]이 근왕창의(勤王倡義)의 기치를 걸며 의병을 일으켰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단발령까지 공포되자 반일의 기운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896년 1월 중순부터 경기도·충청도·강원도 등의 각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의병이 일어났고, 2월에는 경상도와 강원도, 함경도 북부까지 확대되었다.

경기도에서는 1896년 1월 경상북도 의성 출신의 김하락(金河洛)[1846~1896]이 이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천의병은 1월 18일 백현전투에서 일본군 180여 명과 싸워 승리하였으나, 한 달 뒤 이현전투에서는 일본군에게 패배하였다. 이후 이천의병은 남한산성의 광주의병진과 연합하여 수원으로 진군한 뒤,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는 일본군과 관군을 협공하고자 하였다. 이천의병은 수원 진군까지는 성공하였으나, 남한산성에서 일부 의병이 관군에 매수된 탓에 패배하며 해산되었다. 이천의병의 지도자 중 화성 지역 출신 주도자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화성 지역 출신 인물들이 의병으로서 참여하였다는 사실만 확인이 될 뿐이다.

이천의병 이후에도 당시 화성 지역이 속해 있던 수원군에서 의병 활동이 소규모지만 벌어지고 있었다. 『독립신문』 1896년 5월 10일 자 기사에는 수원 영통리에 있는 한성부관찰사 유기환(兪箕煥)의 집을 의병이 습격, 수원부 포군이 출동하여 전투 끝에 의병 3명이 전사하였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또 인근 용인·남양·이천 등의 지역에서 의병 활동이 활발하였다는 기사도 있어 수원·화성·남양 지역 일대의 의병 활동이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을사의병]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발하여 1905~1906년 동안 전국적으로 발생하였다. 특히 동학농민운동의 잔여 세력이 가입한 활빈당(活貧黨)이 의병 운동 대열에 흡수되어 의병 전쟁의 핵심적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을사의병 중 가장 먼저 봉기한 지역은 원주·제천·단양 등 한반도 중부 지방이었다. 1905년 9월 원용석(元容錫)·박정수(朴貞洙) 등이 원주 동쪽 부근 주천(酒泉)에서 격문을 보내 의병을 규합하고 의병진을 편성하였다. 그러나 원용석과 박정수의 의병진은 일진회(一進會)와 원주진위대의 급습을 받아 해체되고 말았다.

단양에서도 정운경(鄭雲慶)이 300~400여 명의 의병을 소집하였으나, 원주진위대의 공격으로 해산되었다. 1906년 3월에는 안병찬(安炳瓚)·박창로(朴昌魯)·채광묵(蔡光默)이 홍주에서 수천 명의 의병을 규합하고 홍주성을 근거지로 삼으려 하였으나, 관군의 공격으로 실패하고 중심인물이 잡혀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뒤이어 5월 19일, 민종식(閔宗植)·이세영(李世永)의 의병이 전투 끝에 홍주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서울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남하하여 관군과 함께 홍주성을 포위하였고, 5월 31일 혈전 끝에 홍주성이 함락당하며 홍주의병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화성 지역에서 의병 활동은 활빈당 및 수적(水賊) 등과 연계하여 이루어졌다. 활빈당은 단순한 도적 무리가 아닌, 빈부 타파와 국가 혁신, 외세 타도를 목표로 하는 반봉건·반제국주의 민중 집단이었다. 따라서 을사조약 전후에 활빈당이 의병 운동 대오에 합류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였다. 화성 지역에서는남양군의 활빈당 및 수적들이 의병장들의 지도를 받으며 점차 의병으로 전환되었고, 정미의병 때 큰 활약을 하였다.

[정미의병]

1907년, 고종 강제 퇴위와 정미칠조약 등 일제의 만행이 지속되자 전국에서 의병 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정미의병 때는 정미칠조약으로 인해 해산된 군인들이 봉기하거나 신식 무기를 들고 의병에 합류하여 의병의 전술적 강화와 질적 향상이 있었다. 1907년 8월 1일 서울에서 군대 해산에 반발한 시위대가 봉기하였고, 8월 9일에는 강화·개성·안성·북한산분견대를 관할하던 수원진위대의 강화분견대가 봉기를 일으켰다. 강화분견대의 부교 연기우(延起羽)는 군대 해산 명령이 내려오자 반발하여 동료 지홍윤(池弘允) 등과 8월 9일에 군인들을 이끌고 무기고를 확보한 뒤, 군수이자 일진회 수령인 정경수(鄭景洙)를 처단하였다. 또한, 강화도의 일본 순사와 일본인을 사살하였다. 연기우 등은 강화성을 장악하였으나, 곧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각처로 분산되었다. 강화도에서 탈출한 강화분견대 소속 군인들은남양군 연안의 영흥도·선재도·대부도·선감도·자월도·덕적도 등 여러 섬으로 흩어졌다. 이들은 서해안 일대 도서를 중심으로 활동한 화성 지역 의병의 원동력이 되었다.

정미의병 시기 화성 지역에서 활동한 대표적 의병장은 용인에서 의병을 규합한 정주원(鄭周源)[1870~1908]이 있다. 정주원은 1907년 8월 15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였다. 8월 29일 새벽에 일본군 40여 명의 습격을 받고 패전하였으나, 9월에 죽산·양지에서 농상공부 주사 출신 임옥여(任玉汝) 부대와 연합하여 9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게 되었다. 정주원은 부대를 3개로 나누고, 자신은 당시 화성 지역이 속해 있던 수원으로 이동하였다. 나머지 두 부대는 양지와 죽산에 배치하였다. 1907년 11월 남양만 고온포로 이동하여 근거지로 삼았으며, 1908년 1월에는 당진주재소를 습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908년 7월 19일 충청남도 해미군 적서촌(赤鼠村)에서 일본군에게 적발되어 체포되고 말았다. 정주원이 붙잡히자 정주원의 의병 부대에서 대대장을 맡았던 안춘경(安春敬)이 남은 의병 부대를 이끌었다. 1907년 9월 안춘경은남양군 연안의 영흥도와 대부도를 근거지로 활동하였으며, 10월에는 장안면 소재의 우편취급소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정미의병 시기 화성 지역에서는 의병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1908년 1월 10일에 향남읍 발안시장에서 의병 80여 명이 일본 수비대 보병 제47연대 제9중대와 교전하였으며, 1월 11일에도 의병 60여 명이 경찰관 및 연합토벌대와 교전하였다. 1월 20일에는 의병 50여 명이 팔탄면 해창에서 수원수비대와 교전하였으며, 2월 21일에는 의병 6명이남양군 음덕리에서 남양수비대와 교전하였다. 1908년 3월 19일에는 의병 26명이 화성시 매송면 원촌마을을 습격하여 일본인 첩자 1명을 납치 살해하였다. 3월 20일에는 의병 14명이 비봉면 유포리에서 남양수비대가 파견한 척후 5명과 2시간에 걸친 전투를 전개하였다. 향남면 제암리 출신의 해산 군인 출신 홍원식(洪元植)[1877~1919]은 충청남도 지역 일원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수원에서 활동하던 의병장 천하준(千河駿)은 남양군 삼괴 지역에서 방곡령을 내리고 쌀의 일본 유출을 막기도 하였다.

정미의병 시기에 치열하였던 화성 지역의 의병 활동은 일제가 남양수비대와 수원수비대를 수시로 토벌대로 파견하고, 1908년 5월부터 육지와 해상 양쪽으로 초토화 작전을 벌이자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호남 지방 의병을 대상으로 한 남한대토벌작전 이후 경기도 지역에도 토벌 작전이 시작되자, 화성·수원 지역의 의병 운동 역시 소멸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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