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684 |
---|---|
한자 | 孫鳳鉉 |
영어공식명칭 | Son Bong-hyeon |
이칭/별칭 | 승휘(昇徽),손말봉(孫末鳳)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노규현 |
출생 시기/일시 | 1894년 3월 11일 - 손봉현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3월 - 손봉현 대종교 입교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3월 - 손봉현 신민부 가입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4월 - 손봉현 군자금모금 활동 전개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7월 31일 - 손봉현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31년 8월 - 손봉현 출소 |
활동 시기/일시 | 1941년 - 손봉현 귀향 |
몰년 시기/일시 | 1969년 7월 10일 - 손봉현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10년 3월 10일 - 손봉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31년 9월 18일 - 손봉현 대종교 총본사 동경으로 이전 |
출생지 | 가곡리 - 경상남도 밀양시 상동면 가곡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손봉현(孫鳳鉉)[1894~1969]의 본관은 밀성(密城), 호는 승휘(昇徽), 이명은 손말봉(孫末鳳)이다. 1894년 3월 11일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상동면 가곡리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손봉현은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익히는 한편 인근 한의원에서 의술을 익혀 한약방을 열어 직업으로 삼았다. 1923년 동서 손호(孫滸), 김홍규(金弘圭), 이병묵(李丙默) 등의 권유로 한약방을 접고 1925년 3월 북만주 영안현(寧安縣)으로 건너가 윤세복(尹世復)이 이끄는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대종교 교인들을 주축으로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조직한 신민부(新民府)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7년 4월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 김좌진(金佐鎭) 장군으로부터 일제 고관과 친일 분자의 주살, 주요 시설의 폭파, 군자금 모집 등의 밀명을 받고 국내에 들어와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신민부에서 소요될 군자금을 모으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1927년 11월 동서 손호 등과 함께 부호인 장인 김태진에게 군자금 3,000원을 받아내고, 또 처남 김용출을 북만주로 데려가 대종교 교인으로 만드는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1928년 7월 31일 ‘1919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등의 혐의로 체포되었다. 3년의 실형을 언도받고 상고를 포기한 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31년 8월 3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감한 뒤 다시 북만주 밀산(密山) 당벽진(當璧鎭) 지역으로 건너가 대종교도로서 활동하는 한편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9월 18일 일어난 만주사변(滿洲事變)으로 대종교의 총본사(總本司)를 동경성(東京城) 지역으로 옮길 때 동참하였다.
1941년 봄 고향인 경상남도 밀양으로 돌아온 뒤, 1969년 7월 10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손봉현에게는 2010년 3월 1일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