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야진사는 용신을 모시고 있다. 용신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이 용당에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중리 이장의 설명을 각색하여 보았다. 옛날에는 양산을 옥당고을이라고도 했는데, 그 시절에 양산을 다스린 사또가 경상도의 가장 높은 관리인 감사에게 편지를 전하기 위하여 마을의 총각 조씨를 대구로 보냈다. 그런데 이 총각은 대구로 가는 도중에 누군가가 자기를 미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
-
그 옛날 삼국시대에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많은 전투가 일어났다. 많은 병사와 사람들이 보고픈 가족들을 뒤로 하고 전장에 나가서 죽음을 맞이했다. 남아 있는 가족들은 슬픔을 뒤로 하고 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용소에 제를 올렸다. 용소는 신라와 가야국 사이의 강을 중심으로 한 접전지로 보인다. ‘용’은 물의 신으로 청룡, 황룡, 백룡, 인룡이 있는데, 수장된 군사들을...
-
양산읍성의 처음 축성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양산의 옛 지명이 삽량주이므로 성의 이름도 삽량성이었다. 고대 문헌에서 등장하는 삽량성의 기록에서 조선시대 이전의 양산읍성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삼국사기』 권3, 463년(자비마립간 6) 2월에 ‘왜인이 삽량성을 침범했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라는 기록이 있어서, 현재의 석성의 형태는 아니겠지만 463년(자...
-
명곡마을을 감싸는 산 가운데 오른쪽 신인 백호에 해당되는 야트막한 능선이 있다. 부드럽게 마을을 남쪽으로 감싸 돌면서 평지로 잦아든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산이지만 이곳에서 옛날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이곳이 일명 ‘명곡리 고분군’이라고 불리는 지역이다. 주로 4~5세기의 토기류가 발굴되었다. 토기류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생활용기이므로 당시에는 이...
-
고려 전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문신. 본관은 양산(梁山). 자는 정고(貞固). 할아버지는 김연(金衍), 아버지는 김지(金贄), 아들은 김덕부(金德符)이다. 김맹은 성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인으로 활동하였다. 1001년(성종 20) 흥료(興遼)가 거란을 배반하자 거란이 사신을 보내 고려의 구원을 청하였을 때 곽원이 왕에게 “압록강 동쪽 가에 있는 거란의 성(保障)을 이...
-
고려 전기 양주방어사를 지낸 무신. 본관은 김해(金海). 김서현(金舒玄)의 후손이다. 김원현은 『고려사』에 1044년(정종 10) 진사 을과에 합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양산군수인 이만도가 찬한 비명에 의하면 문종 때 양주방어사에 임명되었을 때 왜적이 군선 190여 척을 이끌고 삼차강(三叉江)에서 양산으로 진격하자, 김원현은 전투복을 갖추고 힘써 싸워 많은 적을 참하...
-
고려 전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호족. 양산(옛 양주)은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9주 5소경의 하나가 되어 지방 지배의 거점 역할을 하였다. 신라 말기 사회적 혼란을 틈타 각 지역에서 호족세력이 등장하였으며, 양산에는 김인훈이 중심이 된 군소호족세력이 등장하였다. 김인훈은 903년 양주(良州) 수(帥)로 있을 때 다른 세력과의 정치적 갈등으로 심각한 상황에 처하자 궁예에...
-
경상남도 양산시에서 서진을 시조로 하고 서몽호·서의손·서두조를 입향조로 하는 달성서씨 후손들이 모여 살고 있는 마을들. 서씨의 중심 본관은 이천서씨이며, 나머지는 모두 이천서씨에서 분파된 것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와 『조선씨족통보』에는 이천서씨에서 달성·장성·연산·남평·평당·부여 등이 갈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시조는 서진(徐晋)으로 고려 때 봉익대부판도판...
-
사기장 고 신정희의 큰 아들인 신한균 사기장은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아 현재 지산마을에서 도자기를 굽는 생활을 하고 있다. 그를 찾은 봄날의 어느 저녁에 신한균 사기장은 우리나라 도자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가운데 양산과 관련된 것이 있어서 더욱 귀를 기울이게 했다. 신한균의 말을 인용해 본다. “일본에는 다도문화가 발달해 있어서 차사발이 많아요. 그 중...
-
명동은 흥려박씨와 학성이씨가 어우러져 사는 집성촌이다. 명동마을의 이러한 내력을 보여주는 것이 흥려박씨 문중 사당인 귀후재이다. 이 사당의 구조는 콘크리트 목조건축 형식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겹처마로 이루어져 있다. 출입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집을 거쳐서 들어가야만 대문이 나온다. 정문에는 신덕문(愼德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신덕이...
-
이곳 지산마을 일대의 영축산 산자락은 야생화의 보고이다. 이곳 산자락에 있는 통도사 서운암에서 매년 들꽃 축제가 열린다. 2002년에 이어 7회째 열린 이 축제는 개막법회에 이어 여러 행사가 화려하게 이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볼거리는 아마 천지에 수놓은 들꽃일 것이다. 서운암 뒤가 바로 영축산 자락이라서 시선을 어디에 두어도 온통 들꽃으로 뒤덮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우리나라의 곳곳에 용과 관련된 땅이름이 많고, 이들 땅이름의 유래에 대한 설명에서 용이 나타났다는 기록을 담은 역사자료들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양산만 하더라도 용당이라는 땅이름은 원동뿐 아니라 서창에도 있다. 이곳 용당은 예로부터 ‘용’과 관련된 전설이 많은 지역이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용당(龍塘, 양산과 김해 쪽 이름이 같다)이라고 하며, 그 앞쪽의 낙동강을 용소(龍沼)...
-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사찰로 더 유명한 통도사는 우리나라에서 불법을 전하는 중심이 되어 왔다. 통도사의 의미와 규모를 굳이 정치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지역구가 아닌 전국구 사찰인 셈이다. 영축산 자락의 남쪽 기슭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수많은 암자들이 골짜기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지산리는 영축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여러 능선 중...
-
지산마을에는 반세기 동안이나 잊혀졌던 조선사발을 다시 재현한 우리 그릇 세계의 실로 큰 그릇이 있다. 조선사발의 명맥을 잇는 집념의 장인, 신정희 선생이다. 70평생을 전통 도자기 재현에 몸 바친 선생의 열정이 뜨겁게 불타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명맥이 끊어졌던 조선사발을 재현한 사기장, 고(故) 신정희(申正熙)[향년 77세] 선생의 뒤를 이어 사기장의 길로 들어선 큰...
-
▶ 축서암 지산마을회관 앞 운동장에서 등산로를 따라 마을을 지나 300여m 가면 1711년(숙종 37)에 동우대사가 건립한 축서암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절(암자)들은 주로 마을로부터 떨어져 있거나 아니면 자연과 일정한 조화를 가지면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축서암은 통도사에 소속된 암자이지만, 영축산 아래 지산마을 속에 있어 마을사람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
-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 마을사람들에게는 전깃불에 얽힌 기억이 적지 않게 남아 있었다. 이 마을은 1960년 초까지만 해도 호롱불에 의해 방안의 어둠을 부분에만 밝혔다. 어두운 호롱불 밑에서 길쌈을 하고, 베를 짜고, 새끼를 꼬고, 짚신을 삼고, 가마니를 치고, 멍석(등시기), 봉태기, 바지게, 소쿠리, 우장(우의)를 매고, 생활 요구를 만드는 등 밤에 이루어진 모든 일은 호롱...
-
명동마을에는 총 세 그루의 당산나무가 이 마을을 지키는 든든한 수호신의 역할을 한다. 명동마을 초입부에서 산 길 쪽으로 가다 보면 명곡슈퍼 회관 앞에 외관부터 예사롭지 않은 나무가 보이는데, 이 나무가 바로 명동마을의 첫 번째 당산나무이다. 양산시에서 지정한 보호수로 나무의 나이가 자그마치 700년이나 되는 높이 19m, 둘레 5.3m인 느티나무이다. 마을 입구에 당당하...
-
장이쌀 제도라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단어이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8월에 추수하고 다음해에 봄보리를 수확할 때까지 배고픔에 시달리는 시절을 보내야만 하였다. 일명 보리고개라는 것이다. 가을 벼농사가 끝이 나면 보리를 심는다. 이듬해 4월쯤에는 장독에 쌀이 동이 났어도 보리를 수확하기까지는 한 달 정도 더 기다려야 한다. 곳간에는 먹을...
-
조선 후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문신. 자는 순지(順之)이고, 호는 지족헌(知足軒)이다. 아버지는 무과에 급제하였던 박현보(朴賢輔)이다. 할아버지는 영조 때 무과에 올라 부사과(副司果)를 지낸 유일(遺逸) 박태규(朴泰奎)이다. 박이혁은 정조 때 음직으로 참봉이 되었다. 일찍이 은거에 마음을 두어 자연을 벗삼아 살고자 하였고, 실제 생활을 그렇게 하였던 인물이다. 자연을...
-
조선 후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국빈(國賓), 호는 이우당(二憂堂)이다. 박중미(朴中美)의 후손이고, 아버지는 박주한(朴柱漢)이고, 할아버지는 박동석(朴東奭)이다. 박정빈은 창원부사 외에도 현감·영장·방어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금정산성을 축조한 공으로 길이 잘 든 말을 하사받았다. 금정산성은 경상도관찰사 조태동이 1702년(숙종...
-
효충마을에서 태어난 박제상은 금교부인(金校夫人)과 결혼하여 1남3녀를 낳았다. 그 가운데 외아들이 백결 선생 박문량이다. 그의 이름은 문량(文良) 또는 누랑(婁琅)이요 호는 백결(百結)이다. 5세 때 아버지 박제상은 왜국에서 충절을 지키다 순국하였고, 모친께서는 울산 치술령에 올라가 동해를 바라보면서 남편을 그리워하다 두 딸과 함께 순절하신 후 홀로 남은 둘째 누이 아영...
-
고려 전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선비. 본관은 양산(梁山). 자는 성장(成璋), 호는 만익(晩益). 아버지는 양산방씨 시조인 방태경이다. 방태경은 방송현(房松衒)과 방송구(房松九) 두 아들을 두었으며, 방송현의 아들은 방규(房圭)로 이조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방송현은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초기에 활동하였던 인물로 추측되며, 중앙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예부참의에...
-
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선비. 본관은 양산(梁山). 자는 도언(道彦), 호는 창산(昌山). 양산방씨의 시조인 방태경의 후손이며, 양산 지역 출신으로 명망이 높았던 방익(房翼)의 후손이다. 방채수에 관하여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양산 문행(文行)조에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재능과 기예가 뛰어났고 슬기로웠다. 말은 어눌했으나, 일을 처리하는 것은 민...
-
고려 전기 양산방씨의 시조이자 문신. 본관은 양산(梁山). 자는 경문(景文), 호는 월정(月汀). 방송현(房松衒)과 방송구(房松九) 두 아들을 두었으며, 방송현의 자는 성장(成璋)이고, 호는 만익(晩益)으로 증예부참의(贈禮部參議)를 제수 받았다. 방송구의 자는 성복이고, 이조정랑과 충청감사 등을 역임하였다. 방송현의 아들 방규(房圭)는 이조판윤 등을 역임하였으며, 방송구의 아들 방...
-
조선 후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선비. 본관은 분성(盆城). 자는 윤보(允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누정 경현당(景賢堂) 조에 의하면 “자는 윤보이고, 본관은 분성으로 영조 때 가선대부를 추증받았다. 효행으로 여러 번 천거받았다”라고 한다. 경현당은 양산시 북부동에 있었는데, 고을 유학자 박천수(朴天銖)·유인협(柳寅協)·이철호(李喆鎬)가 뜻을 함께한 사람들과...
-
조선 후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선비. 본관은 부여(扶餘). 자는 진언(震彦), 호는 송은(松隱). 송담(松潭) 백수회의 후손이다. 1864년(고종 1) 호위영(護衛營)에서 타어평(鼉魚坪[메기들]에 강제로 세금을 부과하여 민폐가 극심해지자 백동호(白東浩)는 자신의 안일을 돌보지 않고 감영(監營)에 정소(呈訴)하여 세금을 면제받게 하였다. 또한 후학을 양성하는 데 앞장섰고, 향교에서...
-
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무신. 본관은 부여(扶餘). 자는 경원(敬元), 호는 경재(敬齋). 할아버지는 통정대부 백유익(白有翼)이고, 아버지는 백사정(白思正)이다.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무과 조에 의하면 “효성과 우애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학문과 덕행이 있었다. 남는 시간에는 집안일을 다스렸다. 성품과 마음 씀씀이는 소박하였지만, 생각은 넓은 세상에 있었다...
-
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선비. 본관은 부여(扶餘). 자는 치오(致五), 호는 만회(晩悔). 아버지는 통정대부 백유익(白有翼)이다. 아들은 부사과(副司果) 백동휴(白東畦)이다.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유행(儒行) 조에 의하면 “타고난 성품이 뛰어나고 총명하였으며, 덕행과 재주가 있었다. 자식을 가르치면서 만년을 보냈고, 정신을 수양하고 몸을 잘 닦아 유학자의...
-
조선 후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선비 본관은 부여(扶餘). 자는 붕지(鵬之). 양산의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인 송담(松潭) 백수회(白受繪)의 후손이다. 아들은 백사정(白思正), 손자는 백동휴(白東畦)이다.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수직조(壽職條)는 백유익에 대해서 “타고난 성품이 순박하면서 경솔하지 않았고, 자신의 지위를 굳게 지켰던 인물이었다. 선조의 가르침을 삼...
-
조선 중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달성(達成). 초명은 기륜(紀倫)이고, 자는 덕행(德行). 할아버지는 원종공신 서중룡(徐仲龍)이며, 서정태의 아들은 영조 때에 가선대부를 제수 받은 서효기(徐孝基)이다. 서정태에 관련한 이야기는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효자조에 수록되어 있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났으며, 수오(睡獒) 서석린(徐錫麟)의 문인이기도 하였다....
-
조선 후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달성(達成). 자는 대칙(大則), 호는 상계(桑溪). 증조할아버지가 원종공신 서중룡이며, 아버지는 숙종 때 효성으로 이름이 높았던 서정태이다. 서효기와 관련한 이야기는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효자조에 아버지 서정태와 함께 수록되어 있다. 서효기는 집안의 효성을 이어받았으며, 유학으로 학문을 아울러 갖추었다. 아버지 서...
-
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무신. 본관은 보성(寶城). 호는 해남(海南).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누정 경현당(景賢堂) 조에 의하면 “호는 해남이고, 본관은 보성으로 무과에 올라 우후(虞侯)에 봉해졌다. 집안을 지켜 규율을 아름답게 하였고, 양산에 살면서 풍속을 착하게 만들었다”라고 한다....
-
양산읍성 내의 마을인 성내리는 성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양산읍성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으며, 성내리라는 지명도 읍성과 함께 사라져 다른 마을들과 함께 통합되어 나눠진 상태이다. 그리하여 지금은 성내리의 예전 모습을 상상하기 조차 힘들다. 하지만 성내리의 일부 모습들은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남북로이다. 성내리의 남북로는 현재 미로의 흔적을...
-
소노마을에 들어서면 두 개의 오래된 사당을 만나게 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동래정씨 사당인 소노서원이다. 동래정씨가 이곳 소노마을에 정착하게 된 시기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고려 말 조선 초기로 보인다. 동래정씨의 가보를 보면 고려 초기에 그들의 조상이 경주에서 부산 동래로 들어왔고 이들 중 일부가 고려 말에 소노마을에 정착한 것이다. 동래정씨가 소노마...
-
객사는 동헌과 함께 지방군현 관청의 중심이다. 객사에는 건물의 중앙에 임금을 상징하는 위패, 즉 궐패(闕牌)와 전패(殿牌)를 모셔놓고 초하루와 보름(음력 1일과 15일)에 지방 수령이 대궐을 향해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따라서 양산객사에 모셔놓은 위패는 살아있는 임금을 상징함으로 일반적인 사당과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또한 객사는 외부의 손님이 오시면 접대하는 일종의 영빈관의...
-
지금은 승려의 세계와 일반인들의 세계가 구분되어 있지만, 과거 일제강점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의 이곳 지산리는 승려의 세계와 일반들의 세계 즉, 승속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승려가 절 이외에도 마을에 와서 생활하고, 마을 사람들이 절로 들어가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승려는 지금의 승려와는 다른 대처승이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처승은 결혼한 승려를 말하는데,...
-
도자기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하면서 사기장 신한균을 찾아갔다. 그의 작업방에 들어가니 사방이 도자기였다. 마침 신한균이 잠깐 자리를 비워서 작업방에 있는 여러 가지 도자기를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다. 조금 있다가 신한균이 들어왔다. 외모는 아주 왜소해 보이긴 했지만 눈매에서 장인의 고집이 느껴졌다. 신한균의 말씀 가운데 가장 크게 와 닿은 것은 바로 도자기에 묻어 있는 일제 잔재를...
-
조선 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의병이자 효자.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순장(舜章), 호는 율농(栗儂). 계산 안우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만성재(晩惺齋) 안평중(安平重)이며, 아버지는 안효필(安孝弼)이다. 부인은 동래정씨이며, 아들은 안종석(安鍾石)이다. 안병원은 1882년(고종 19)에 현재의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에서 출생하였다. 안병원은 효자로 이름난...
-
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선비.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고봉(高峰). 회암 안유(安裕)의 후손이다. 안처익은 향촌사회에서 후진들에게 학문을 권장하고, 주위의 사람들을 가르치며 자연 속에서 은거하며 살았다고 한다.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 의하면 ‘호는 고봉(高峰)이고, 본관은 순흥으로 회암 안유(安裕)의 후손이다.’라고 하였다. 경현당(景賢堂)은 양산 고...
-
조선 후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선비.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대견(大見), 호는 일야(一也).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소계사에 배향된 계산(戒山) 안우(安宇)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만성재(晩惺齋) 안평중(安平重)이고, 아들은 안병원(安昞遠)이다. 일찍이 집안의 가르침을 배웠고, 시문을 짓는 재주가 남달라 이름을 떨쳤다. 마음을 다하여 성명(性命)과 이기(理氣)를 연구하였고, 자...
-
양산 가산리 도요지에서 발견된 조선 전기 분청사기 접시. 분청사기는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도자기로 가마도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양산 지역에는 가산리의 호포마을과 상리마을, 화제리의 지나마을과 사기들, 주남리 등에 도요지가 산재하고 있는데, 지역적으로 주남리를 제외하면 낙동강 수로와 연결되는 지역에 집중해 있다. 양산 가산리 도요지에서 출토되는 도편은 접시...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 중기 향완. 입사(入絲)는 청동이나 입철(粒鐵) 등의 금속 표면에 선이나 면을 파고 그 곳에 다른 금속을 박아 넣는 금속공예 기법이다. 은입사는 고려시대 불교 관련 기구에 널리 이용된 기법으로, 청동과 은의 색채 대비를 통해 다양한 문양을 격조 있게 표현함으로써 우리나라 금속공예의 정수로 평가되고 있다...
-
박제상의 충절을 기리는 효충사 주변에 대해 양산시는 지난 2003년 유적 정비사업을 추진하려 했다. 지금의 소토리 1173-2에 소재한 효충사를 포함한 1만㎡ 부지에 사당 정비는 물론 전시관, 편의시설, 휴식공간, 문화체험공간 등을 조성하는 역사공원화사업이었다. 하지만 효충마을 일부 주민들의 반대에 문화재 지정으로 인한 재산권이 침해된다면서 박제상 생가가 효충마을에 있었...
-
양산읍성은 우리의 기억 저편 속으로 사라져 버린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양산읍성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려졌지만 우리의 역사 속에서는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다. 그중 아름다운 영남의 모습을 자라하던 8루 중의 하나인 쌍벽루가 양산읍성의 마을에 있었다. 쌍벽루(雙碧樓)는 양산읍성 내의 관청의 부속건물, 즉 객사의 서루이다. 객사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누각 아래에는...
-
신라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 설치된 특수 행정구역. 부곡은 전정(토지)이나 호구가 하나의 독립된 고을이 될 수 없는 곳에 설치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는 일반 행정구역과는 달리 부곡제 지역이 기록되어 있다. 부곡제 지역은 부곡·향·소 등을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7 여주목 고적 등신장...
-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에 걸쳐 경상남도 양산 지역을 침략한, 일본에 근거지를 둔 해적 집단. 왜구는 1223년(고종 10)에 금주(현 김해시)를 처음 침략하였으며, 1350년(충정왕 2)부터 본격적으로 우리나라를 침략하였다. 이후 1392년(공양왕 4)까지 169년 동안 총 519회나 우리나라를 침략하였다. 왜구가 침략할 무렵 고려는 내적으로 무신정권·대몽항쟁으로 정치권력이 불안하...
-
용신을 초대하는 향연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용당의 가야진이다. 가야진은 예로부터 가야와 신라의 전투가 자주 벌어졌던 곳으로, 가야진의 진은 군대가 주둔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에 용신을 모시는 가야진사는 낙동강을 건너는 장병의 무사귀환과 승리를 기원하던 사당이었다. 문헌에 보이는 가야진사는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 제사지(祭祀志)에 따르면 신라는 강에 대하여 4곳에 국가제...
-
3월 초하루에 용당 주민의 초대를 받은 용신은 마을사람들의 근심을 어루만져주고 떠나간다. 이 의식을 보기 위하여 마을을 방문하니 마을어른이 제사의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해주셨다. 먼저 용신을 부르는 첫 번째는 의식이 부정가시기라고 한다. 이 의식은 말 그대로 부정을 쫓아 보내는 것으로,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은 제사일 3일 전부터 목욕재계를 하고 제사를 지내는 마당 내외를 청소...
-
위령제를 지내는 삼국시대나 기우제를 지내는 조선시대에도 각각 그 제사의 중요도가 인정되어 국가에서는 제문을 내려 백성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었다. 현재 전하는 문헌에 보이는 제문의 대표적인 것이 『세종실록』에 있는 것이다. 제문은 다음과 같다.(『세종실록』 권28, 세종 7년 6월 25일 계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 되고, 먹는 것은 백성의 하늘이라, 심고 가꾸는 일은 정치의 먼저...
-
매년 봄이 시작되는 음력 삼월 초하루 양산 원동면 용당리의 낙동강 가에 있는 용당들에서는 용이 부활한다. 가야진 용신제이다. 용당리와 인근 원동면의 농민들이 주연 배우가 되어 용당들을 무대로 치러지는 제사이다. 조선시대 이 제례는 서울, 경북 흥해, 충남 공주 등 여러 지방에서 행해졌으나 현재는 유일하게 가야진에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 중요성으로 무형문화재 제1...
-
신라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경상남도 양산시에 설치된 특수 행정구역. 부곡은 전정(토지)이나 호구가 하나의 독립된 고을이 될 수 없는 곳에 설치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는 일반 행정구역과는 달리 부곡제 지역이 기록되어 있다. 부곡제 지역은 부곡·향·소 등을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7 여주목 고적 등신장조에는...
-
소노마을에 들어서면 그 입구 왼쪽에서 소계사를 만날 수 있다. 서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서원을 에워싸고 있는 소나무 숲이 서원을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가다듬게 하고 있다. 본래 소나무는 사시사철 푸르른 잎을 지니며, 강인한 인상을 주는 줄기 때문에 대나무와 함께 변하지 않는 절개를 상징하거나 인품이 뛰어나고 오래 사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소나무 숲 속의 소계서원은...
-
신한균을 방문한 어느 봄날 저녁 신한균 사기장이 묻는다. “사기장이 뭔 말인지 잘 모르지요?” 이어서 “우리는 그거를 장인이라고 합니까? 명인이라고 합니까? 일본에서는 장인을 공인이라고 합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기 전에는 도공이라는 말은 어느 책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말로 하믄 사기장입니다. 도공이라는 말은 일본인들이 즈그 마음대로 바꾼 말입니다.”라...
-
일본은 조선을 강제를 점령한 이후 각 마을의 정신적 지주인 읍성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양산도 그러한 절차를 밟게 되었다. 1931년 양산읍성을 해체하고 읍성의 동헌 터에 일본식 건물인 양산군 청사를 건축하였다. 이로써 조선의 고유의 읍성 모습은 사라지게 되었다. 동헌 자리에 있었던 의춘당, 동헌 아문인 경성루(警省樓)와 서쪽 누각인 춘설루(春雪樓)는 이제는 저 먼 기억속...
-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에서 1598년(선조 31)까지 2차에 걸쳐서 조선을 침략한 일본과의 전쟁이다. 제1차 침략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2차 침략이 정유년에 일어났으므로 정유재란이라 하는데, 이를 통칭하여 임진왜란이라 한다. 이를 일본에서는 ‘문록(文祿)·경장(慶長)의 역’이라고 칭한...
-
양산읍성은 신라시대에 만들어져서 여러 번의 재건축으로 모양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그 정신은 그대로 이어져왔다. 이 읍성이 본격적으로 증축되었던 것은 조선시대 문종 원년(1451)과 성종 24년(1492)에 증축되기에 이르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는 읍성의 규모도 함께 기록되어 있는데, 읍성은 석축이며 둘레가 3710척, 높이고 13척, 성 안에 우물 6개와 못 1...
-
고려 후기 경상남도 양산에서 활동한 문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2 명환(名宦) 조에 “역락(亦樂)이 양주(지금의 양산)의 원으로 부임한다고 하여 아들 조진(趙眞)과 종들이 새벽부터 천수사 문에서 기다렸으나 역락은 친구에게 이끌려 점심때가 되어도 오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하여 조통(趙通)이 양산수령으로 부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경전과...
-
경상남도 양산시 웅상읍 주남리에 있는 조선시대 백자와 분청사기 도요지. 주남리 도요지는 천성산(千聖山) 동쪽 사기점(沙器店)마을 뒤쪽 산기슭에 위치한다. 사기점마을이란 이름은 사기를 구워서 파는 곳이라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마을 이름에서부터 이곳이 일찍부터 도자기를 구워 팔았던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주남리 도요지는 현재 대부분 논과 밭으로 개간되...
-
경상남도 양산시에서 동일 조상의 후손들이 중심을 이루는 마을. 집성촌은 조선 초기부터 조선시대 말기까지 주로 사회의 지배층에 속하여 있으면서 중앙 정부의 관료층과 연관을 가지는 양반 사대부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형성된 씨족 집단의 거주 촌락이고, 거주의 지속성을 보여 일정 지역의 복수의 촌락들을 형성하여 상호 교섭을 가진다. 파(派) 단위의 거주 범위는 상당히 넓고 동성...
-
양산 소토리 효충마을은 신라의 충신 관설당(觀雪堂) 박제상(朴堤上)이 태어난 고향으로서 그 분에 관한 설화와 유적지가 찾아진다. 박제상이 만들었던 정자인 징심헌과 그의 저서인 『징심록(澄心錄)』이 그것이다. 먼저 징심헌은 현재 남아 있지 않으므로 전해오던 이야기와 문헌에 의해서 알아볼 수밖에 없다. 징심헌이 세워진 시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박제상이...
-
지산마을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면 그렇게 크지 않은 비석을 발견하게 된다. 비석이 있을 만한 자리가 아닌데도 비석이 있어서 상당히 생소하고 엉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비석의 명문은 ‘팔도승지금지석(八道僧之禁地石)’이다. 비석에 대한 관리도 잘 되어 있지 않고 비석 앞에 세워져 있는 조그만 푯말에 통도사 소유라고만 되어 있다. 비문의 글귀만 해석해 보면 팔도의 승려가 들...
-
지산마을 언덕을 넘어가면 장밭들이라고 불리는 넓은 들판이 나온다. 이곳은 통도사 소유의 땅이다. 본래 통도사는 신라시대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된 이래 고려시대를 지나오면서 많은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통도사의 소유토지를 알려주는 국장생석표 등이 멀리 밀양에 있는 것을 볼 때 이러한 정황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억불정책을 시행하였으나 통도사의 소유토지에까지는...
-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신라 말 고려 초에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했던 토착 집단. 호족은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지방에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일정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던 독자적인 지방 세력을 말한다. 호족은 수(帥)·성주(城主)·장군(將軍)·적수(賊帥)·적(賊)·웅호(雄豪)·호걸(豪傑)·호족(豪族)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앙 정부의 통치력이 크게...
-
양산시내에서 35번 국도를 타고 통도사 쪽으로 가다가 어곡터널 쪽으로 좌회전해서 다리를 건너면 효충마을을 만나게 된다. 이곳은 신라의 그 유명한 충신인 박제상이 태어난 곳으로, 효충사는 그를 모신 사당이다. 효충사를 찾기 위하여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니 막다른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효충사는 1960년 소토리 율리마을의 안종석이 주도하여 설립하였고, 동년 11월 9일에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