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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0028
한자 三山面
영어음역 Samsan-myeon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종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행정구역
면적 27.55㎢[2014년 12월 31일 기준]
총인구(남, 여) 2,038명[남 1,284명, 여 1,050명][2022년 8월 31일 기준]
가구수 1,263세대[2022년 8월 31일 기준]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에 있는 도서면(島嶼面).

[명칭유래]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고도(古島)·동도(東島)·서도(西島)의 3개 섬이 바다에 떠있는 산(山)과 같아서 삼산(三山)이라 칭하였다는 설과, 거문도(巨文島)·초도(草島)·손죽도(巽竹島)를 3개의 산으로 상징하여 삼산이라 칭하였다는 설이 있다.

[형성 및 변천]

조선시대 1396년(태조 5) 흥양현[현재 고흥]에 속해 삼도라 부르고, 현재 면장직과 같은 풍헌(風憲)을 두었다. 거문도사건 후 거문진(巨文鎭)이 설치 되었는데 『풍화거문도진지』에 의하면 “갑신년(1884)부터 정해년(1887) 까지 4년 동안 영국 함대 수십 척이 본도 앞바다에 정박하여 무장을 하고 경비를 하지 않는 날이 없었으며 물 속에 목책을 세워 이곳을 별구(別區)로 만들었다. 조정에서는 어명으로 참판 엄세영을 보내어 영국 사람의 동정을 정탐하게하고 이때부터 교섭하여 영국군을 완전히 철수시켜 돌아가게 했다. 또 경략사 이원회로 하여금 이 섬의 지형상의 피해를 막을 수 있는 진(鎭)을 설치하도록 순찰하게 하고 이 지방을 정비하게 했다. 이때 이곳이 흥양현이란 소문을 들었으나 다시 삼도의 이름을 거문도라 고쳐 부르기 시작했다. 고종 임금은 정해년(1887)에 독진(獨鎭)을 설치하고 수군첨절제사 겸 수방장을 두어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라고 적고 있어 삼도거문도로 고쳐 부른 것과 거문진의 설진 배경을 알 수 있다. 조선을 지켜왔던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과 좌수영 산하의 방답진(防踏鎭)과 더불어 거문진도 1895년 7월 15일(고종 32년) 일본의 간계에 의해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그 후 1905년 거문진 청사는 해체되어 서도 장촌리의 사립 낙영학교 교사 건축에 사용되었다.

1908년(순종 1)에 전라남도 돌산군 소속으로 서도리삼산면 면사무소를 설치하였으며, 1914년 전라남도 여수군에 예속되었다가, 1949년에 전라남도 여천군으로 소속이 변경되었다. 1998년 4월 1일 여수시·여천시·여천군 통합에 따라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으로 변경되었다.

[자연환경]

전라남도 여수시 최남단에 위치한 곳으로 거문도를 중심으로 초도, 손죽도, 광도, 평도 등의 유인도와 백도를 비롯한 크고 작은 다수의 무인도로 이루어진 섬지역이다.

[현황]

2022년 8월 31일 기준 면적은 27.48㎢이며, 총 1,263세대에 2,038명[남 1,284명, 여 1,050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6개 법정리와 10개의 행정리를 관할하고 있으며, 주요 섬으로 거문도, 초도, 손죽도, 평도, 광도 등이 있다. 대부분 해발 200~300m 정도의 산지로 구성된 작은 섬들로 산지가 대부분이고 평지는 거의 없다. 주요 농산물은 보리·고구마 정도이며, 대부분의 주민이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연안 해역은 멸치·도미·삼치 등이 주요 어장을 이루고 있으며, 주민들은 대부분 거문도·초도·손죽도 등에 거주하고 있다.

여수항에서 쾌속 여객선으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지역으로 중간에 손죽도초도를 경유하게 된다. 특히 다도해해상국립공원거문도 동쪽 해역의 백도 지역은 무인도이나 빼어난 절경으로 국가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1호인 「거문도 뱃노래」와 같은 다양한 민속의 무형문화재가 있으며, 손죽도초도를 비롯한 삼산면 지역에는 영국인 묘, 여수 손죽도이대원사당 등의 문화재 등이 산재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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