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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도의 도독장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0825
한자 猫島-都督將軍
영어의미역 Legend of Provincal Governor of Myodo Island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묘도동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준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전설|지명담
주요 등장인물 진린|유정|이순신
관련지명 도독마을
모티프 유형 지명유래담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묘도동에 전해 내려오는 명나라 장수 진린에 관한 이야기.

[개설]

묘도광양만의 중앙에 자리 잡은 섬으로 정유재란 때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1543~1607]과 관련된 지명과 유적이 남아 있다. 묘도에서 광양항이 바라다보이는 평암산을 배산으로 서북으로 터져 있는 골에 터를 잡은 도독마을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사마천의 『사기』나 『광동진씨족보』에 의하면, 진씨의 원조는 중국 고대 황제 순(舜) 임금으로서 그 후예 호공만(胡公萬)이 지금의 하남성 일대에 진(陳)나라를 세우면서 국호를 본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 후손 만삼랑(萬三郞)이 광동성 옹산(翁山) 밑에 터를 잡으면서 중국의 광동진씨가 생겼고 진린은 그로부터 6세손이다. 진린의 손자가 명이 망하자 청나라를 피해 완도 고금도로 이주해 정착하고 할아버지인 진린을 시조로 삼아 우리나라의 광동진씨(廣東陳氏)가 시작하였다.

[내용]

진린의 자는 조작(朝爵), 호는 용애(龍崖)이며, 1543년 중국 광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문무가 출중했으며, 19세 어린 나이에 연대장격인 파총(把摠)에 발탁되어 광동성 내에서 발생한 20여 건의 소요 사건을 평정하여 신종으로부터 크게 인정을 받았다. 그 후 진린은 무신으로서 승승장구한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명의 변방까지 시끄럽자 신종은 부총병으로 산동 지방의 왜구 방어의 책임을 지고 있던 진린을 흠차총령수병어왜총병관전군도독부도독수군도독(欽差總領水兵禦倭總兵管前軍都督府都督水軍都督)으로 임명한다.

이에 진린 도독은 1598년(선조 31) 4월 수병 5천 명, 전선 5백 척, 보병과 기타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요동을 거쳐 압록강을 건넜다. 1598년(선조 31) 6월 동작 나루에서 선조의 성대한 전송을 받은 진린은 1598년(선조 31) 7월 16일 당시 전라 수군 본영이었던 완도 고금도에 도착하여 덕동에서 조금 떨어진 묘당도에 진을 쳤다. 처음에는 이순신 장군이 이끈 우리 수병과 충돌이 심했다.

『선조실록』에 나타난 바로는, 전투에도 참전하지 않고 외곽에서 구경만 하던 그들은 우리 수군이 거둔 적의 수급을 협박해서 가져갔고 번번이 이순신 장군의 출전을 방해하기까지 했다. 이런 불상사는 오래가지 않았다. 1598년(선조 31) 9월 21일, 진린 도독은 수군 5천 명과 전함 5백 척을 거느리고 고금도를 출발하여 순천 왜성에 갇혀 있던 왜적을 섬멸하려고 묘도에 진을 쳤다. 진린은 이틀 동안 군장을 수습하고 나서 곧바로 장도에 비축한 적의 군량을 불살랐고 왜성을 공격했다.

당시 육군장 유정(劉綎)이 이끈 군사들과 1598년 10월 9일까지 두어 차례 수륙 양면 작전을 펼쳤으나 적의 저항으로 사도첨사 황세득과 많은 병사를 잃었다. 진린은 적의 퇴로를 열어주는 왜장의 휴전 제의에 넘어가 병력과 함께 1598년 10월 9일 고금도로 철수했다. 진린은 적들의 뇌물 공세에 잠깐 마음이 흔들렸으나, 이순신 장군의 강력한 설득으로 1598년 11월 11일 다시 묘도에 진을 친 뒤 노량해전에 참전한다. 이로써 진린이 묘도에 진을 친 기간은 27일이 되는데 묘도의 도독마을이 바로 그 흔적의 터이다.

전란은 적선 500여 척을 섬멸하고 끝이 났다. 진린은 전란을 치른 동안 이순신 장군의 지휘력과 전략 전술 그리고 이순신의 인품에 깊이 탄복해 마지않았고 종종 지휘권도 양보했다. 이순신 장군을 부를 때는 이야(李爺), 노야(老爺)라는 존칭을 사용했고, 심지어 중국에 들어가 벼슬하기를 여러 차례 권했다고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진린은 명나라 신종에게 이순신을 하늘을 날로 삼고 땅을 씨로 삼아 베를 짜는 재주와 하늘을 메우고 해를 목욕시킬 공(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을 지닌 위인으로 묘사하며 치하해 주도록 요청했다. 전란이 끝나고 진린은 1599년(선조 32) 4월 명나라로 돌아갔다. 진린은 조선에서의 전과로 광동백에 봉해지고 사후에 태자소보에 추증되었다.

[모티프 분석]

『여천시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도독마을은 정유재란 당시에 명나라 진린 장군의 수군이 진을 친 데서 형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도 진린의 직함을 따라 도독포, 도독개라고 불리며 그때 쌓은 산성이 남아 있다. 주위에는 성곽과 포대를 설치했던 흔적도 있다. 임진왜란 때 지원병을 거느리고 주둔했던 격전지를 마을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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