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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1437
한자 牧場
영어의미역 Ranch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장여동

[정의]

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 지역의 가축 사육을 목적으로 만든 목초지, 건물, 목책 등을 설비한 토지.

[개설]

목장은 국방용·교통용·식용 등으로 일정 동물을 사육하는 곳을 말한다. 조선시대에 목장은 병조 사복시(司僕寺) 소관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별도로 감목관을 두었다가 후에는 지방 수령이 맡거나 도서 지방에 수군이 있는 경우에 해당 수군의 장이 겸하게 하였다. 감목관 아래에는 감목을 두고 그 아래 노비 신분의 목자(牧子)를 두었다.

목장은 맹수로부터 보호되고 사료와 급수가 용이하며 가축의 관리가 편리한 반도형이나 도서 지방에 설치하였다. 목장을 운영하기 위해 축사·사료 창고·사료 저장실·목책·관리 사무실 등을 두었고, 특히 고대 사회에서는 말을 신성시하여 마신당(馬神堂)도 두었다. 남부 지방에는 임진왜란 이후에 대대적으로 목장이 증설되었다.

[내용]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여수 지역의 목장은 장흥부 소속으로 고흥의 도양곶목장 관할이었다. 도양곶목장은 1445년(세종 27)경에 설치되었고, 1629년(인조 7)에 순천부의 곡화목(曲華牧)으로 분리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순천도호부 산천조에 백야곶(白也串)·돌산도(突山島)·묘도(猫島) 등 세 곳에 목장이 있다고 하였고, 『여지도서(輿地圖書)』순천 목장조에도 같은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다.

곡화목은 소호리 해안에서 오천리 해안까지 돌로 성처럼 쌓아 말을 키웠다. 이곳에 수용된 말은 1,007필이었으며, 목자(牧子)는 446명이었다고 한다. 『여수군읍지(麗水郡邑誌)』에 있는 기록으로 보아 1894년(고종 31)에 곡화목장은 폐지되고 궁내부(宮內部)에서 관원을 파견하여 세금을 징수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돌산목장은 돌산의 남단 돌산읍 금성리 작금에서 신북리 금단 사이에 돌로 쌓아 만들었다. 지금도 소호동 해안부터 오천동 해안까지 곡화목장 분계성이 이어져 있는데, 이곳에서는 만리성 터라고도 한다. 돌산목장에 대한 기록은 『승평지』나 『호남읍지순천부읍지』에 기록되어 있는데, 말의 수가 116필, 목자 12명, 감목관 1명이 있었다고 한다. 번창기에는 말의 수가 1,302필까지 늘어났고, 목자 역시 363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백야곶목장은 화정면 백야도의 작은 섬에 있던 목장으로, 이곳에서는 군마(軍馬)를 길렀다고 한다. 백야곶은 임진왜란 당시에는 군마 훈련장이었다. 지금은 모두 논밭으로 변하여 목장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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