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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1814
한자 興國寺 僧塔群
이칭/별칭 흥국사 부도밭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흥국사길 160[중흥동 17]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조미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6년연표보기 - 흥국사 승탑군 조성
흥국사 승탑군 - 전라남도 여수시 흥국사길 160[중흥동 17]지도보기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흥국사에 있는 조선 후기부터 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승탑들을 모아 놓은 탑군.

[개설]

흥국사 일주문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왼쪽 이단의 석축 위에 조성한 승탑군이 보인다. 중앙에 나 있는 계단을 올라가면 중앙의 소나무 옆 동편으로 흥국사를 창건한 보조국사탑(普照國師塔)이 나온다. 보조국사탑을 중심으로 왼쪽[향우]에 7기, 오른쪽[향좌]에 4기 등 모두 12기의 승탑이 일렬로 도열해 있다. 그 오른쪽 한 단 아래로 최근에 입적한 증공당 종현 선사의 승탑이 조성되어 있다.

흥국사 승탑군은 오른쪽부터 경서당탑(敬西堂塔), 응운당탑(應雲堂塔), 우룡당탑(雨龍堂塔), 응암탑(應庵塔), 보조국사탑(普照國師塔), 호봉당탑(虎峰堂塔), 금계당탑(錦溪堂塔), 능하당대사탑(凌霞堂大師塔), 취해당탑(鷲海堂塔), 무명탑(無名塔), 중흥당법수대사탑(中興堂法修大師塔), 낭월당탑(朗月堂塔)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12기의 승탑은 석종형 3기 외에는 모두 구형 승탑으로 16세기에 2기, 17세기에 4기, 18세기에 3기, 19세기에 2기, 20세기에 1기가 건립되었다. 원래는 흥국사 관내 여러 곳에 산재해 있었으나 1986년 현재의 자리로 이건하였다.

[경서당탑]

경서당탑(敬西堂塔)은 구형의 승탑으로 흥국사 승탑군의 맨 서쪽에 위치한다. 전체적으로 장식이 풍부한 미려한 승탑으로 옥개석은 중흥당법수대사탑(中興堂法修大師塔)과 친연 관계가 많다. 기단부는 보조국사탑(普照國師塔)과 친연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장식이 보다 생략적인 모습이어서 중흥당법수대사탑을 모본으로 삼아 이보다 늦게 건립된 것으로 파악된다. 지대석에서 기단부까지 높이는 51㎝이며 탑신부는 76㎝, 옥개석은 54㎝이고, 전체 높이는 181㎝이다.

1560년(명종 15) 법수 대사가 흥국사를 중창하자 수행승이 구름같이 모여들었고, 이로써 전국 3,000의 비보사찰 가운데 으뜸이었다고 전한다. 법수 대사는 16세기 후반에 입적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따라서 경서당탑은 중흥당법수대사탑을 모본으로 하여 17세기 전반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응운당탑]

응운당탑(應雲堂塔)은 경서당탑과 같은 구형의 승탑이다. 탑구는 장대석으로 쌓았으며, 앞에는 방형의 널찍한 배례석이 마련되었다. 탑신석은 별석이며 상하가 절단된 장타원형으로 중앙의 하부가 볼록한 모습이어서 안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탑신석 전면 중앙에 ‘응운당(應雲堂)’이라는 당호가 세로로 음각되었다. 옥개석은 별석으로 평면 육각형으로 육모 지붕형이다. 하면 중앙에는 한 단 낮게 파내어 탑신석의 상부를 끼우도록 하였고, 일단의 받침을 마련하고 외곽에는 모서리마다 추녀와 사래를 모각하였다. 추녀와 사래 사이에 원형의 연목과 방형의 부연을 모각했고 처마는 높게 표현하였다. 처마의 상단에는 막새기와가 모각되고 모서리 전각부에는 사래에서 올라온 문양이 내림마루 끝에 표현된 귀면와를 받치고 있다. 방형의 지대석과 그 위에 올린 기단부까지 높이는 32㎝이며, 탑신부는 77㎝, 상륜부는 76㎝이고, 전체 높이는 185㎝이다.

응운당은 『동사열전(東師列傳)』권6 「운룡선사전(雲龍禪師傳)」에 소개되어 있는 응운증오(應雲證悟)이다. 1780년(정조 4) 4월 의승 300명과 함께 흥국사 선당을 중수하였다. 응운당은 18세기 말 입적한 것으로 추정되므로 응운당탑도 그 즈음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우룡당탑]

우룡당탑(雨龍堂塔)은 일석으로 치석된 장방형의 배례석이 놓여 응운승탑과 같은 탑구 안에 봉안되어 있다. 탑구는 땅을 수평으로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으나 후면에는 없다. 탑신석은 별석으로 상하가 절단된 장타원형이며 중앙의 상부가 하부보다 넓다. 탑신석의 정면 중앙에 ‘우룡당(雨龍堂)’이라는 당호가 세로로 음각되어 있다. 뒷면에는 ‘갑자오월립(甲子五月立)’이라고 건탑 일자를 음각하였다. 지대석에서 기단부까지 높이는 34㎝이며, 탑신부는 77㎝, 상륜부는 61㎝이고, 전체 높이는 171㎝이다.

우룡당은 1907년(순종 1) 흥국사 보광전 후불탱화와 1917년 원통정 개금불사 및 같은 해 설선당에 팔상도를 모실 때 화주의 소임을 맡은 승려 배문환(裵文燦)의 당호이다. 탑신 뒷면에 새긴 건탑 일자로 보아 1924년에 입적한 것으로 추정된다.

[응암탑]

응암탑(應庵塔)은 석종형으로 방형의 지대석 위에 기단부를 올렸다. 탑신석은 범종형이며, 상륜과 일석으로 치석하여 정면 중앙에 종서로 ‘응암탑(應庵塔)’이라고 탑명을 음각하였다. 상륜부는 고부조로 양각한 염주와 같은 연주문대로 구획하여 탑신석과 경계를 나누었다. 연주문대 위에는 6엽의 연판이 새겨진 연봉형의 보주를 표현하였다. 지대석에서 기단부까지 높이는 53㎝이며, 탑신부는 80㎝, 상륜부의 보주는 42㎝이고, 전체 높이는 152㎝이다.

응암은 낭윤(郎允)[1718~1782]의 법호로, 낭윤은 곡성에서 출생하여 13세에 부모를 여의고 15세에 칠불암 덕균 장로에게 축발하고 용담(龍譚) 대사에게 수구(受具)하였다. 18세에 송광사 풍암(楓巖) 문하에서 5년~6년간 진승(眞乘)을 배웠다. 묵암은 응암의 법형으로 흥국사 산내 암자인 정수암에 머문 적이 있다. 응암이 입적하자 문인들이 송광사와 칠불암에 응암의 초상을 모셨다. 응암탑은 1782년(정조 6) 응암이 입적한 직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조국사탑]

보조국사탑(普照國師塔)은 석종형으로 지대석이 없이 기단부 위에 석종형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탑신석은 약간 긴 석종형으로 탑신석의 정면 중앙에는 ‘보조국사(普照國師)’라는 주인공의 이름을 종서로 음각하여 지눌[1158~1210]의 승탑임을 알려 준다. 지대석에서 기단부까지 높이는 43㎝이며, 탑신석은 75㎝, 보주는 25㎝이고, 전체 높이는 143㎝이다.

보조국사탑은 흥국사 승탑군에 있는 승탑 12기 가운데 맨 처음 건립되었다. 보조국사를 흠모하던 법수 대사가 흥국사를 중창하던 1560년(명종 15) 보조국사탑을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호봉당탑]

호봉당탑(虎峰堂塔)은 구형이며, 방형의 지대석 위에는 중대석이 없이 하대석과 상대석이 연접한 기단부를 올렸다. 탑신석은 구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정면 중앙에 ‘호봉당(虎峰堂)’이라는 당호를 종서로 음각하였다. 옥개석은 별석으로 평면 6각으로 육모지붕을 모각하였으며, 상륜부는 유실되었다. 지대석에서 기단부까지 높이는 50㎝이며, 탑신석은 79㎝, 상륜부는 34㎝이고,로 전체 높이는 163㎝이다.

호봉당은 영조 때 호봉(虎峰) 홍변(弘卞)이다. 1729년(영조 5) ‘영축산 흥국사 봉황대○○○’에 홍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1741년 제작된 여수 흥국사 삼장보살도의 화기에 “산중대선사호봉당홍변비구(山中大禪師虎峰堂弘卞比丘)”라고 기록되어 있다. 같은 해 제작된 「흥국사 감로탱」과 「흥국사 팔상전 후불도」의 화기에도 홍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승려 홍변이 1729년(영조 5)에서 1741년(영조 17) 사이 흥국사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금계당탑]

금계당탑(錦溪堂塔)은 구형이며, 지대석이 없이 기단부는 하대석과 상대석을 연접한 2단 구성이다. 탑신석은 상단과 하단이 잘린 장타원형으로 정면 중앙에 ‘금계당(錦溪堂)’이라는 당호가 종서로 음각되어 있다. 금계당의 행적에 관해서는 알려진 내용이 없다. 옥개석에서 기단부까지 높이는 36㎝이며, 탑신석은 79㎝, 상륜부는 36㎝이고, 전체 높이는 150㎝이다.

금계당탑의 대좌는 17세기 전반에 건립된 경서당탑과 친연 관계를 보이고 있으나 조각 기법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 경서당탑보다 후행의 모습을 참작하면 17세기 중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능하당대사탑]

능하당대사탑(凌霞堂大師塔)은 구형이며, 탑신석은 상하가 절단된 장타원형으로 평면 원형의 탑신석 정면 중앙에 ‘능하당대사(凌霞堂大師)’란 당호가 종서로 음각되었다. 옥개석과 상륜부는 일석으로 치석하였으며, 옥개석에서 기단부까지 높이는 44㎝이며, 탑신석은 63㎝, 상륜부는 53㎝이고, 전체 높이는 160㎝이다.

능하당의 행적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승탑의 양식으로 미루어 17세기 중반 흥국사에서 입적한 것으로 추정된다. 옥개석의 모습이 중흥당법수대사탑과 친연 관계를 보이고 기단부는 보조국사탑과 친연 관계를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금계당승탑과 동시대인 17세기중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취해당탑]

취해당탑(鷲海堂塔)은 석종형이며, 지대석 없이 기단부에 탑신부를 올린 모습이다. 탑신석의 정면 중앙에 ‘취해당(鷲海堂)’이라는 당호가 종서로 음각되었다. 상륜부 하단에는 고부조의 연주문으로 구분하고 그 위에 끝이 첨형인 반구형의 넓적한 보주를 올렸다. 상륜부는 탑신석과 일석으로 치석하였다. 옥개석에서 기단부까지 높이는 40㎝이며, 탑신석은 72㎝, 상륜부는 13㎝이고, 전체 높이는 125㎝이다.

취해당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기단부 상대석은 17세기 전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서당탑과 친연 관계가 있고, 탑신석은 1609년(광해군 1) 건립된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삼공리 백련사 정관당 승탑(白蓮寺 靜觀堂 僧塔)과 친연 관계를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17세기 전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무명탑]

무명탑(無名塔)은 구형이며, 수매의 장대석으로 결구된 작은 탑구 안에 일석으로 치석된 방형의 지대석이 있다. 탑신석은 상단과 하단이 단절된 장타원형으로 탑신석에 당호가 표시되지 않아 승탑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지대석에서 기단부까지 높이는 74㎝이며, 탑신석은 60㎝, 상륜부는 66㎝이고, 전체 높이는 200㎝이다. 조각 기법이 매우 퇴화되어 있으나 특이하게 상륜부에 방형의 기둥이 표현되어 있다. 무명탑은 1890년(고종 27)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흥당법수대사탑]

중흥당법수대사탑(中興堂法修大師塔)은 구형이며, 지대석 없이 기단부 위에 탑신부를 올렸다. 기단부는 중대석 없이 하대석과 상대석이 연접된 이단 구성으로 하대석은 반구형으로 표면에는 복련이 장식되었다. 탑신석은 상단과 하단이 단절된 장타원형으로 비교적 긴 편이다. 탑신석 정면에 상단에 ‘중흥당(中興堂)’이란 당호를 음각으로 횡서하고 ‘흥(興)’ 자 아래에 ‘법수대사(法修大師)’라는 법명을 음각으로 종서하였다. 상륜부는 옥개석과 일석으로 치석하였다. 상륜부 하단에는 고부조된 연주문대로 옥개석과 구별하고 그 위에 상단이 첨형인 반구형의 보주를 올렸다. 기단부는 보조국사탑의 양식을 계승하였으나 탑신부와 옥개석은 장식적인 모습이다. 옥개석에서 기단부까지 높이는 32㎝이며, 탑신석은 73㎝, 상륜부는 55㎝이고, 전체 높이는 160㎝이다.

법수 대사는 1560년(명종 15) 흥국사를 중창한 법수(法守)와 동일인이다. 16세기 후반 법수 대사가 입적한 것으로 미루어 중흥당법수대사탑은 이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낭월당탑]

낭월당탑(朗月堂塔)은 팔각 원당형으로 좁고 엉성한 원형의 기단이 중첩되어 있다. 기단의 표면에 복판 팔엽의 복련이 조식되었으나 마모가 심하다. 탑신석은 평면 팔각의 기둥형으로 매우 특이한 모습이다. 탑신석 중앙에 ‘낭월당(朗月堂)’이라는 당호가 종서로 음각되어 있다.

19세기 후반 건립된 무명탑과 친연 관계를 가지고 있으나 선행 양식이며, 17세기 중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능하당대사탑과도 친연 관계가 있으나 후행 양식이다. 옥개석에서 기단부까지 높이는 26㎝이며, 탑신석은 59㎝, 상륜부는 20㎝이고, 전체 높이는 105㎝이다.

낭월당은 연담유(蓮潭有)[1720~1799]의 법계로 영월성신(靈月誠身)의 제자였던 보문묘환(普門妙煥)과 낭은성순(朗隱性順)의 동문인 낭월영밀(朗月永密)로 추정되며, 법맥상 완호윤우(玩虎倫佑)[1758~1826], 대은조오(對隱朗旿)[1780~1841]와 같은 항렬로 보인다. 19세기 전반 입적하여 낭월당탑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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