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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1864
한자 東嶺小碣
이칭/별칭 기실비(紀實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고소동 620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병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비|기실비(紀實碑)
건립시기/일시 1698년연표보기
관련인물 심인조|남구만
재질 사암
높이 119㎝
너비 60㎝
소재지 주소 전라남도 여수시 고소동 620 지도보기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고소동에 있는 ‘여수 통제이공 수군대첩비’를 세우게 된 내력을 적은 조선 후기 기실비.

[건립경위]

현감 심인조(沈仁祚)가 ‘여수 통제이공 수군대첩비’의 건립 경위와 여기에 참여한 인물들, 그리고 건립하기까지의 어려움 등을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후세에 충무공 이순신을 숭모하는 정신을 전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장방형 비신 뒷면 음기에 "숭정기원후주갑무술인정일립(崇禎紀元後周甲戊寅丁日立)"이란 명문이 있어 숙종 24년(1698)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형태]

장방형 비좌에 1매석으로 된 탑신과 옥개(玉蓋)가 있다. 비좌(碑座)는 마멸이 심하여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식이 심하다. 정면과 측면에 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옥개석에는 좌우에 나선형의 장식이, 반원형 중앙에 여의주 무늬가 앞뒷면으로 있으며, 맨 위에는 연꽃 봉우리형 보주가 조각되어 있다.

[금석문]

거슬러 20년 전 이오성(李鰲城)이 체찰사가 되어 나랏님을 배알한 날 선왕께서 제일 먼저 충민사(忠愍祠)를 창건하라는 명을 듣고 하래하여 드디어 대첩 비문을 지어 통제사에게 주었다. 유형(柳珩) 공은 자기에게 임무가 주어짐을 강개하고 먼저 재료를 모으기 시작하였으나 공사가 쉽지 않아 중지하였다.

공 역시 타직으로 전출되어 황해도 절도사로 가게 되었다. 몸은 비록 타도에 있으나 마음은 이 역사(役事)를 잊지 못하다가 강음에서 돌을 구하여 바다에 떠서 서울로 들어왔다. 조정에 계청하였으나 해변에 버려져 있은 지 몇 년이 지나게 되었다. 이제 절도사 안륵(安玏) 공이 새로 도착하던 날 목욕재계하고 제를 올리되 개연(慨然)히 충혼에 감사하고 영원히 썩지 않게 할 뜻을 가짐이 오래되었다. 그때 이야(李爺)의 아들 전 현감 이회(李薈)가 와서 보고 서로 순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즉시 막속 전 현감 임영(林英)과 전 판관 정원명(鄭元溟) 등에게 명령을 내려 원근 석공들을 모아 서로 운반할 돌의 양을 나누어 거둬들였다. 전 호조참의 이창정(李昌庭)공 순천부백 강복성(康復誠)공이 힘을 모아 도와주었다. 이에 가까운 읍 수령과 변방 수장 역시 혹 물품을 보내주던지 새벽부터 밤까지 부역을 도와 반 년이 지나 역사를 마치니 그 열렬함의 흔적이 비에 자세히 새겨 만세 불민하게 되었다.

진실로 당초에 유공과 여러 군자의 힘이 아니면 어찌 이를 얻을 수 있으리오? 유공이 임종을 당하여 자식들에게 말하기를 “이야의 비석이 세워지지 않으면 내 묘 앞에도 비를 세우지 말라”고 하였다. 그 이야를 숭모하는 정성은 죽어서도 잊지를 않으셨느니라. 경신년 1월에 비를 세우니 타루비도 이 비 옆으로 옮기느니라.

이에 앞서 연해 사졸들은 공을 위하여 세운 비를 바라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린 비(碑)이다. 슬프도다! 이야의 일은 사람의 입이 모두 비(碑)이니 비록 돌에 기대할 수 없어 사람들이 돌을 세워 일의 전말을 간략히 기록하여 별도로 작은 돌을 세우니라.

[현황]

고소대 내 여수 통제이공 수군대첩비여수 타루비 옆에 세워진 동령소갈은 비각 안에 있으나 석질이 사암이라 마멸이 많이 진행되고 있어 비좌의 문양은 식별이 어려울 정도이다.

[의의와 평가]

정면과 측면에 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옥개석에는 좌우에 나선형의 장식이, 반원형의 중앙에 여의주 무늬가 앞뒷면으로 있다. 맨 위에는 연꽃 봉우리형 보주가 조각되어 있는 독특한 형태를 갖추고 있어 비석 형태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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