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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1871
한자 麗水李良將軍防倭築堤碑
영어의미역 Stele for General Yi Yang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 472[동문로 11]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병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2003년 10월 4일연표보기 - 여수이량장군방왜축제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40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여수이량장군방왜축제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성격
건립시기/일시 1643년연표보기
관련인물 이량
재질 화강암
높이 149㎝
너비 70㎝
소재지 주소 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 472[동문로 11]지도보기
문화재 지정번호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 진남관에 있는 조선 중기 이량이 쌓은 방왜축제를 기념하는 비석.

[개설]

여수이량장군방왜축제비는 1497년(연산군 3) 전라좌수사로 부임해 온 이량(李良) 장군이 장군도 동쪽과 돌산 북쪽 사이의 해협으로 왜적이 침입하는 것을 봉쇄하고자 둑을 쌓은 사실을 적은 내용으로, 원래 장군성비와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고 전한다. 이량의 5세손 이배원(李培元)이 글을 짓고, 6세손 이필(李泌)이 글씨를 써 1643년(인조 21)에 세웠다. 그 후 비가 훼손되자 8세손 이삼(李森)이 1710년(숙종 36) 지금의 충무동에 다시 비를 세웠고, 1984년 여수 진남관으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위치]

장군도 선창에서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섬의 정상부에 이르는데, 여기서 돌산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비가 있는 여수 진남관이 나온다.

[형태]

반원형의 옥개와 비신이 한 덩어리로 되어 있고, 옥개 윗부분에는 보주형 조식이 있지만 부분적으로 파손되었다. 높이는 149㎝이고, 너비는 70㎝이다.

[금석문]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조(先祖) 함천군의 휘는 , 자는 자방이며 함평이씨이다. 이러한 사실 공적이 조정에 알려져서 국사에 기록되어 있다. 모든 것을 다 기록할 수 없으나 이 주비(원래 장군도에 세워졌던 비)에 그 전말을 석면에 대략 기록하였다. 홍치(弘治) 10년 정사(丁巳: 1497)년에 왜군이 녹도에 침입하여 그 수장을 죽였다. 조정은 이 일을 무마할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웠는데, 그때 공은 부친상을 입고 있었다.

그 일의 적임자로 공이 다시 발탁되어 명을 받들었다. 조정의 명을 받들고 힘을 써서 그간의 사정을 둘러보았다. 겨우 수개월 후에 왜군이 다시 쳐들어왔다. 공은 부대를 이끌고 자신이 직접 창칼을 들고 전선을 이끌고 출동하니 모든 적이 크게 패하여 귀와 코를 밴 것이 아주 많더라. 그 공으로 인하여 가선으로 특진급하였다.

좌수영의 남쪽에 바다가 있는데 거기에 한 섬이 있으니 파도와 조류가 몹시 빨랐다. 예로부터 왜구가 침입하여 침탈할 때에 노략질하는 놈들은 모두 이 섬 사이를 경유하여 임의대로 왕래하였다. 공은 그 형세를 살피고 그 환을 끊고저 이때 공사를 독려하여 그 바다의 깊이와 넓이를 재어보았다. 따라서 영 소속 배로 명하여 돌을 운반하여 그 바다 속에 돌을 던져 넣으니 빠르지도 늦지도 않았다.

날이 가고 달이 가니 돌은 많아지고 물은 얕아져서 배들이 통과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도 또 넣으니 축대가 물 위로 나타나며 마치 성곽을 쌓은 것 같다. 파도를 가르고 옆으로 버티어 있더라. 도둑들이 와서 보고 하늘의 조화로 만들어진 것처럼 의심하고 감히 다시는 넘보지 못하더라. 이로부터 외침을 알리는 변방의 봉화는 드물게 피어오르게 되고 백성은 편하게 지내게 되니 영원히 고맙게 여기게 되었다. 이것은 국가를 위하여 일대 방어책이 되었느니라.

이때에 남쪽 백성들은 그 섬을 이름 하여 장군도라 부르고 비석을 세우고 공로를 칭송하였느니라. 그 뒤 숭정 신사에 공의 후손이 마침 절도사로 와서 그것(비)을 보고 비석이 훼손되어 떨어져 나가 알아볼 수 없게 되어 드디어 망가져 전할 수가 없게 됨을 염려하여 서울에 사는 일가들에게 알리게 되니 2년이 지난 계미 2월에 비석을 고쳐 세웠다.

공의 5세손 감사 배원이 글을 짓고 육세손 함능부원군 해가 그 면에 적어넣었다. 이제 불초 후예가 비문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니 슬프고 공경하는 그리운 마음 가눌 길이 없구나. 자획은 떨어져 나가 글자는 없어지고 결렬되어 읽을 수가 없구나. 오호라 계미로부터 이제 겨울 60년이 지나갔는데 이 비석이 망가졌으니 오래가지는 못하리라.

이는 바닷물과 해풍 때문에 쉽게 마멸되어 버린 것이 분명할 것인저. 이래서 재력을 모으고 영내에 비를 옮겨 세우니 이는 영의 서문 밖이라 영원히 썩지 않을 장소이기를 바라서이다. 이 일을 할 때 영하의 군민이 명을 듣고 즉시 달려오니 우리 선조의 방왜의 위열함을 가이 상상할 수 있도다. 백성들에게 입힌 혜택 오히려 이제까지 생생하고 후손들의 영모하는 마음도 끊이지 않고 그 역시 무궁할지어다. 팔세손 가선대부 행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삼(李森)이 삼가 기록함."

[현황]

1643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비는 밑 부분이 훼손된 채 자연석 위에 세워져 있고, 비문이 새겨져 있기는 하나 마멸이 심해 알아볼 수 없다.

[의의와 평가]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수중성(水中城)의 건립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2003년 10월 4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40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5.05.06 항목명 수정 이량장군 방왜축제비->여수 이량장군 방왜축제비로 수정(2015.5.6)
2010.12.26 이량장군방왜축제비 현황 문화재자료지정 기록
이용자 의견
한** 네티즌 조미선님이 시청홈페이지 [홈페이지 모니터]코너에 등록된 글입니다.

""장군도 선창에서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섬의 정상부에 이르는데, 여기서 돌산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비가 있는 여수 진남관이 나온다.""
--> "~~비가있는 여수 진남관이~"는 "~~비가 있는 산 중턱(or 정상)이"이로 수정되어야 할것같습니다.
2011.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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