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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31035
한자 黃炳益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국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종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22년 10월 28일연표보기 - 황병익 출생
몰년 시기/일시 1984년 4월 30일연표보기 - 황병익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20년 3월 1일연표보기 - 황병익 대통령 표창 추서
출생지 완도군 - 전라남도 완도군 노화읍 신목길 46-1[신양리 357]
학교|수학지 여수공립간이수산학교 - 전라남도 여수시 국동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황병익(黃炳益)여수공립간이수산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인 1942년 11월 민족 차별을 하는 일본인 교사 축출과 모국어 사용 허용, 근로보국대 반대 투쟁 등을 주도하였다. 이후 폭력행위처벌법 위반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 후 순천검찰분국을 경유하여 광주지방검사국으로 송치된 후 심한 고문을 받았으나 1943년 1월 13일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활동 사항]

황병익여수공립간이수산학교 5학년 때인 1942년 11월 일본인 교장이 ‘일본 천황이 청년 학도들에게 내리는 조서’를 낭독하려고 하자 학생들과 함께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교문을 빠져 나가면서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당시 여수공립간이수산학교 학생들은 종포의 옛 등대 밑에 모여 앞으로의 활동에 대하여 논의한 후 학교로 돌아왔다. 그리고 일본인 교사들을 차례로 불러 “민족 차별 언행을 시정해 줄 것과 모국어를 쓸 수 있도록 할 것. 민족 차별이 심한 일본인 선생 한 사람을 보낼 것” 등을 요구하고, 만약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내선일체(內鮮一體)에 어긋나는 것이니 징병에 응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김민석, 지익표, 김충홍 등이 이 거사의 선두에 섰다.

이에 학교 당국에서는 요구를 들어 줄 것 같은 태도를 보였으므로 학생들은 일단 정상적으로 등교하였다. 그러나 며칠 후 일본 경찰들이 주동 학생들의 집을 급습하여 태극기를 찾아내고 60여 명의 학생을 검거하였다. 이때 5학년 김민석, 황병익, 박노기와 4학년인 지익표, 김충홍, 오영섭, 성상규 등은 치안유지법 및 폭력행위처벌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검찰은 황병익 등에게 치안유지법을 제외한 폭력행위처벌법 위반은 무죄로 하고 기소유예하여 1943년 1월 13일 석방시켰으나 여수공립간이수산학교에서는 무기정학이나 퇴학 처분을 내렸다. 당시 풀려나지 못했던 김민석 등은 매월 1회 광주지방법원에 출두하여 재판을 받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황병익의 공훈을 기리어 2020년 3월 1일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공훈전자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 여수지역독립운동가유족회(https://blog.naver.com/hong9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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