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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객선 중복호와 사무장 나계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C030203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종길

1984년 돌산대교가 완공되기 전까지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의 교통편은 여객선뿐이었다. 여수 구항 건너 우두리에는 수시로 오가는 나룻배가 있었지만 우두리에서 군내리는 걸어서 서너 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라 배편이 아니면 시내로 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군내리 출신의 30~40대 이상의 성인이면 마을과 여수 시내를 오가면서 겪었던 여객선과 얽힌 사연 한두 가지 없는 사람이 없는 것도 이런 상황 때문이다.

군내리에서 팔복상회라는 동네 수퍼마켓을 운영하는 나계순은 2008년 현재 나이가 64세로 돌산도남면 지역을 오가는 여객선 사무장으로 20여 년을 보낸 사람이다. 직장 생활은 군내리 농업협동조합에서 시작하였는데 여수에서 여객선 사무장을 하던 선배의 소개로 창영호 사무장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창영호는 당시 여수시 남면연도까지 운항하고 다시 우학리로 돌아와 밤을 보낸 뒤에, 다음날 아침 남쪽 연도로 내려가 곳곳의 마을 주민을 싣고 여수항까지 운항했다. 32세에 결혼하고 아이들이 태어나 큰 아이 유치원 다닐 무렵 군내리의 같은 선사에서 운영하는 중복호 사무장으로 갈아타게 되었다.

사무장이란 여객선의 운항 요금을 관리하는 일이며 부기와 기장을 하는 사무에 밝아야 하는 일이었는데, 농업협동조합에서 다루던 사무에 비하면 쉬운 일이었다. 여객선의 운항은 선장의 책임지고 화물 운송은 갑판장을 거쳐서 사무장에게 넘어 온다.

갑판장은 선장의 보조 역할과 화물을 취급하고 사무장은 여객의 운임인 선표와 배의 경비 관리를 맡는다. 배에는 선장 1명, 갑판장 1명, 갑판원 2명, 기관장 1명, 기관부 1명, 조기장 1명, 허드렛일과 식사를 담당하는 화장 1명 등 모두 8명 정도가 함께 근무했다. 여객선은 바다를 운항하는 일이라 항상 날씨에 따라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직업이다.

돌산대교가 놓이기 전까지 폭풍주의보가 발효되면 여객선이 출항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섬 주민들은 출렁이는 선실을 여관 삼아서 밤을 지세우고 폭풍주의보가 해제되면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다들 농수산물을 팔려고 나온 초라한 행색이라 시내 지역에 아는 사람이 있어도 불편한 자리보다 마음이 편한 배에서 잠을 자는 사람이 많았다. 이럴 때면 사무장도 할 수 없이 배에서 함께 행동을 했는데, 배에서 밥까지는 책임질 수 없었지만 두부라도 사오면 배에 있는 김치쪼가리에 술 한 잔씩 나누는 정도 있던 때였다.

중복호 근무 시절에는 다행히 큰 사고가 없었다. 태풍 때는 군내리 방파제 안에 피항하면 안전했다. 돌산도를 항로로 하였던 중복호는 금천·군내 예교·신기·작금까지 운행하였다. 돌산도만을 운항하던 중복호 시절에는 금천에서 작금까지 모든 주민을 거의 다 알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때 사귄 인연으로 애경사도 찾아 오가고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배를 타는 사람들은 미신이 많은 편이다. 명절 때는 배를 위한 제사를 지내고 개나 염소, 노루 등 짐승을 조심한다.

여객선의 역할은 승객의 여행 뿐 아니라 섬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운송에도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다 보니 무거운 짐을 싣고 내리는 데 위험이 커 안전을 지켜내는 일이 승무원의 가장 큰 일이었다. 나계순은 안전을 지켜내는 가장 쉬운 일로 친밀한 인간관계를 꼽았다. 중복호를 타는 승객 대부분이 돌산읍의 고향 사람이고 잘 아는 사이라 서로 조심을 잘 하고 승무원 지시를 잘 따랐다. 큰 사고가 없었던 중복호의 경력은 그래서 가능했을 거란다.

선박에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안개이다. 특히 봄철 오전에 많이 끼게 되는데 안개 때문에 조난당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레이더가 갖추어지기 전이라 안개가 끼면 닻을 내리고 안개가 벗겨지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는데, 오전에 닻을 내린 배가 해가 져도 안개가 벗어지지 않아 하룻밤을 해상에서 보내게 되었다. 다행히 백야도 마을이 가까워 연락이 닿아서 종선을 이용하여 고구마를 가마솥에 삶아 와 승객들에게 저녁 대신 한 개씩 주고 밤을 새우고서야 안개가 벗어져 운항하였다.

운항중 산통을 겪고 아이가 태어난 적도 있었다. 창영이라는 사람인데, 창영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름을 그렇게 지었던 것이다. 나계순도 경험했던 적이 있다. 화태리에 사는 산모인데, 배에서 산통을 겪게 되었다. 그래서 선실 뒤 한 칸을 비워 주고 승객 중 산파 경험이 있는 아주머니를 대기시키고 혹시 싶어 물도 끓였는데 다행히 여수의 병원에 도착한 뒤에 태어났다. 당시에는 배에서 애를 낳으면 보자기도 해주고 옷도 선물하면서 배에 경사스러운 일로 여겼다.

섬 지역을 오가는 배였지만 여객선의 화물은 수산물보다는 농산물이 많았다. 봄이면 마늘이 많았고 겨울이면 시금치가 많았다. 여수시 화양면을 운항하던 창성호는 봄이 되면 딸기 석짝이 한 배 가득이었다. 파와 콩, 옥수수 등도 많았다. 승객보다 화물 때문에 힘이 들었다. 수산물로는 전복과 참돔·감성돔·돌돔 등이 많았는데, 살아 있는 고기를 큰 대야에 바닷물과 함께 넣어 살려서 팔러 가는 사람이 많았다.

돌산도에서 여객선이 없어진 때는 1994년이다. 마지막까지 돌산도를 운항하였던 중복호에서 사무장을 지냈던 나계순의 옛 경험은 빛바랜 사진첩 속의 이야기처럼 들려오지만 지금도 사람 내음이 더 짙었던 그 시절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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