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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과 함께 소도시 마을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E010403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덕양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정현

조그마한 마을에 불과했던 덕양마을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의 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1930년 여수-광주간 철도가 개통되면서 덕양역이 설치되고 1933년 면 소재지가 옮겨오면서부터이다. 덕양은 이때부터 소라면의 중심지만 아니라 교통의 요지로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소라면에는 일제강점기 때 바다를 막아 조성한 농토가 있었는데 복산간척지가 446,283㎡, 관기간척지가 2,479,350㎡, 대포간척지가 4,462,830㎡나 되는 넓이였다. 이 농토는 일본 회사인 고뢰합명회사가 관리하는 대단위 농장이었다. 이곳에서 수확되는 농산물은 무려 수십만 석에 이르렀는데 대부분이 덕양으로 집하되어 보관되었다가 반출되었다. 이처럼 덕양은 소라면 일대의 간척지에서 수확된 농산물의 1차 집산지가 되었다. 자작농의 경우에는 자급자족을 하고 남은 농산물을 가까운 장터에 내다 파는데 반해 소작농들은 농토에서 수확한 농산물을 농장주에게 내야 했다. 논일 경우에는 나락을 내고, 밭일 경우에는 목화를 냈다. 수확철이 되면 소작농들은 나락과 목화를 우마차에 싣고 고뢰농장 덕양 창고까지 가야 했다. 덕양 창고에 모아진 농산물은 덕양역을 통하여 일본 등지로 반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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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뢰농장 창고터

소작인은 일정량의 나락과 목화를 소작료로 내기만 하면 나머지 잉여 농산물은 소작인 몫이었다. 소작료로 나온 농산물뿐만 아니라 잉여 농산물과 일반 농가 농산물이 이곳으로 유입되면서 덕양은 농산물 집산지로 변모하게 되었고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지게 되었다. 덕양과 가까운 간척지 농경지에는 많은 농가가 입주하고 있었는데, 농촌이란 농산물 외의 공산품은 자급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도시 등지에서 구입을 해야 했다. 이들이 구입할 수 있는 가까운 곳은 덕양뿐이었다.

간척지가 조성된 이후부터 이 지역과 가까운 덕양은 상가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덕양은 소라면의 소재지인데다 덕양역이 소재하고 있었다. 덕양역을 중심으로 점포가 하나둘씩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945년 해방 당시에는 덕양역을 중심으로 20여 점포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뒤 수십 년 동안 덕양이 성장하면서 업종도 다양해졌고 덕양역 앞에서부터 차츰 간선도로변으로 상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덕양에 주거하는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이들을 상대로 하는 서비스업종도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덕양이 번창하면서 고층 건물도 하나둘씩 들어서게 되었다. 도시 건축물의 상징인 고층 아파트가 이곳에 들어섰다는 것은 덕양이 상당히 도시화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오늘날 덕양이 작은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던 것은 면 소재지가 있었기 때문이지만 분명히 배후지에 넓은 농경지와 농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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