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6D0303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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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송내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웅규 |
“박정희 대통령 때 학교 선생님들이 공업고등학교를 가면은 대학을 안가도 먹고 살 수 있는 기능인들이 된다고 하셨죠.”
부천공업고등학교는 부천의 대표적인 교육기관 중 하나로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6월 부천농업중학교로 처음 개교를 하였다. 그러다 1954년 소사농업고등학교로 설립인가가 나고 1973년에 부천공업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게 되었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8년 52회 졸업식을 거행하였고 총 21,868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유서 깊은 교육기관이다. 송내동에도 부천공고 출신들이 상당수 있어 규모 있는 모임도 꾸리고 있다.
“제가 소사중학교 출신인데 중 3때 선생님들이 공고를 가면은 대학을 안가도 먹고 살 수 있는 기능인들이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저도 그게 계기가 돼서 공고를 갔어요. 처음에는 어렵게 공부를 했어요. AID 차관이 들어온다고 해서 공고 학생들이 앞으로 좋아진다고 희망적인 말들이 많았죠.”(김동연, 지역 토박이, 1952년생)
AID차관은 개발도상국의 경제개발을 목적으로 미국이 제공하는 장기융자의 하나인데, 우리나라에서는 1959년 첫 개발차관으로 동양시멘트가 설립되었고, 이후 민간을 대상으로 한 개발차관도 시작했다. 그러다가 1995년 개발대상 차관국에서 제외되었다. 이때 AID차관은 개발도상국의 경제발전에 긴요하다고 판단되는 사업을 우선 육성하게 함으로써 국제무역과 민간투자를 촉진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AID차관의 대상국은 융자금을 본래의 목적에 충실히 사용할 것을 해당 정부가 보증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당시 우리나라에는 이 AID차관을 기반으로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진행되고 있었고, 그 중 하나가 부천공업고등학교와 같은 교육기관에 대한 투자였다.
“그런데 저희 때는 맛을 못 봤어요. 저희 졸업하고 2년 정도 있다가 차관이 들어오기 시작했거든요. 제가 전자과 2회거든요. 원래 부천공고가 농업학교였어요. 처음에는 소사농공이었다구요. 생각보다 오래된 학교예요. 부천에서는 학교가 소명여중·고, 소사농업중·고등학교[부천중·고등학교] 그렇게 양대 학교가 주류로 되어 있었죠. 소명은 지금 성가병원 옆에 있어요. 소명은 가톨릭 재단에서 운영을 하고 있는데 상당히 오래된 토박이죠.”(김동연, 지역 토박이, 1952년생)
이렇듯 부천공업고등학교는 50년 이상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한국전쟁 때 개교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역사가 긴 만큼 부천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즉, 부천공고는 지역민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책임졌던 부천 교육의 산실 중 하나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산업 기능을 갖춘 인재를 중요시하는 것은 학교 밖 공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드르륵, 드르륵’ 재봉틀 박음질 소리는 우리나라 산업화시대를 견인한 원동력이었다. 이에 박노해 시인은 ‘미싱’에 묶인 공장 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시다의 꿈’이라는 시에 담기도 했다. 어머니와 누이의 재봉틀에서는 낡은 옷이 새 옷으로 변신했고 때로 예쁜 가방이 만들어졌다. 마치 요술 같은 재봉틀 기술은 헤지고 찢어진 우리의 옷을 새것처럼 말끔히 수선하는데 당시 산업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보물이었다.
송내동은 마을 대부분이 농촌지역이어서 미싱을 사용하는 집도 거의 없었지만 도시개발 바람이 불면서 아이디알미싱 회사가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났고, 송내동이 산업지역으로 변화하게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매일 손으로 한 땀 한 땀 떨어진 옷을 깁던 마을 여자들은 재봉틀을 들여놓으면 무슨 보물이라도 들여 놓은 듯 잠을 설치면서 보고 또 만지고 했다.
“여기가 처음에는 완전히 촌이었는데 아이디알미싱이 들어오는 바람에 큰 변화를 맞이했지요. 아이디알미싱이라고 삼정공단 안에 있었어요. 저기 새로 생긴 아파트 단지가 예전에 삼정공단이 있던 자리예요. 삼정공단은 삼정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임대사업을 했던 회사였는데 미싱회사가 그 뒤를 따라 들어왔죠. 옛날에는 우리나라에 아이디알미싱하고 브라더미싱이 유명했어요. 그러다 회사가 망하고 유신바늘이 들어오면서 공장임대업으로 전환을 한 거죠.”(이중수, 지역 토박이, 1958년생)
특히 유성기업과 (주)삼정임대공단[전 아이디알미싱] 사이에 있었던 양언리라는 작은 마을에 기업들이 하나 둘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마을의 정체성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기업이 들어오기 전에는 구지5리까지 있었는데 사람도 그렇고 집도 별로 없었어요. 삼정에서 들어오기 전까지는 한 100여 호 됐을까?”(박개원, 지역 토박이, 1942년생)
어느 날 불현듯 나타난 공업고등학교와 요술 방망이처럼 등장해서 어머니들의 잠을 앗아갔던 손재봉틀은 아직도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비록 사라져가고 잊혀가는 것들이지만 송내동이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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