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철의 별미 전어를 두고 흔히 창원 지역에서는 “가을 전어 대가리엔 참깨가 서말”이라거나, “집나간 며느리도 전어 굽는 냄새를 맡으면 되돌아온다.” 혹은 “며느리 친정 간 사이에 문 걸어 잠그고 전어 먹는다.”는 말들이 회자되고 있다. 그만큼 가을철 전어는 별미 중의 별미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전어 중에 붉은색을 띠고 있고 그 맛이 일품인 전어를 흔히 ‘떡전어’라 부르는데 이...
-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에 속하는 법정동. 귀산동은 귀산(貴山)에서 연유한 지명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산을 귀산이라고 지칭한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귀산동은 남쪽에 있는 산성산 부근에 형성된 마을이다. 『호구총수』에 귀산리라는 지명으로 처음 등장한다. 당시에는 웅천현(熊川縣) 하서면(下西面)에 속하였는데, 1908년에 창원군에 편입되었다. 1910...
-
경상남도 창원시 귀산동에 있는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까지의 고분군. 1995년 창원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창원시 문화유적 정밀지표조사 때 확인된 고분군이다. 뚜렷한 고분군의 형태는 알 수 없으나 곳곳에 산재한 소형 봉분의 흔적, 그리고 노출되어 있는 유구석 등으로 볼 때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고분군으로 추정된다. 뚜렷한 고분의 형태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시...
-
일제강점기 귀산본동에는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아이나 어려운 가정 사정으로 공부를 그만두게 된 아이들을 자신의 집에 모아 놓고 글을 가르치던 마을 어르신이 계셨다. 그분은 바로 고(故) 이수복 옹으로서, 일제강점기에 마을 구장도 했던 분이다. 대동아전쟁이 끝나고 해방이 되자 그 해 8월 일본인은 본국으로 돌아갔고, 전쟁에 쓰던 물건들은 쓸모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수복 옹은 일본군...
-
경상남도 창원시 귀산동 봉화산 중턱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지내는 마을 제사. 귀산동 동제는 마을의 주산인 봉화산 중턱에 마련된 제단에서 매년 음력 정월 초하루 자시에 석교마을과 귀산본동이 공동으로 지내는 마을 제사이다. 산제·산신제·당산제·조산 등으로도 부른다. 귀산동 동제는 예전에는 마을의 작은 산인 당산에...
-
예전부터 진해만에서 잡아 올리는 생선의 육질이 단단하고 맛이 좋은 까닭은 이 지역이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포구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이곳 진해만이 고기들의 산란 장소이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같은 생선이라도 고기가 나고 자라는 환경에 따라 그 맛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마을에서 회를 판매하고 있는 주민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이런 천연의 조건을 갖...
-
석교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초이틀에 동제를 지낸다. 동제는 정확하게는 1일에서 2일로 넘어가는 자시(子時)에 지내는데, 이 마을 동제의 유래는 멀리 임진왜란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래되었다고 한다. 5년 전인 2003년까지만 하더라도 작은 산인 할매당산에서 당산제를, 큰 산에 있는 할배당산에서는 산제로 나누어 지냈지만, 최근에는 마을의 주산격인 봉화산 중턱에 마련된 돌...
-
석교마을이 끝나는 해변 가에는 횟집 세 곳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세 집 중 중간 집이 석교마을 596-3번지의 해변횟집이다. 이름 그대로 목이 좋은 해변에 자리 잡고 있는 횟집이다. 주인 박순자(48세) 씨는 남편 정씨와 사별한 뒤에도 남편과 함께 운영했던 이 횟집을 차마 처분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다고 한다. 박순자 씨의 슬하에는 아들 2명이 있는데,...
-
2008년 동지는 12월 21일 오후 9시 4분에 들었는데, 석교마을에서는 예전부터 이 날에는 폿죽(팥죽을 이 마을에서는 이렇게 부른다)을 끓여 성주에 올리는 풍습이 있어서, 집집마다 낮에 폿죽을 끓여 놓고 제 시간에 맞추어 집안 곳곳에 폿물을 뿌렸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정월 안택굿보다 낫다는 말이 예전부터 전해 왔다고 한다. 폿물을 뿌릴 때는 “집안에 잡귀 없애 주고, 1년 열...
-
석교마을 500-1번지에 살고 있는 이종현 옹은 마을에서 유일하게 공직에 몸을 담았던 분으로, 1973년 마산시청 공무원을 시작으로 마산시 창원지구출장소를 거쳐 창원이 시로 승격되면서 창원시청 공무원으로 재직하여 1995년 정년퇴임까지 22년간을 근무하였다. 이종현 옹의 가계는 마을 이장 일을 3대째 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종현 옹의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초기에...
-
예전 현대양행[현 두산중공업]이 들어서면서 각지로 흩어져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 횟집이 하나 있다. 석교마을 626-1번지에 있는 시내버스 종점에서 500m 가량을 더 내려가면 만날 수 있는 똘똘개횟집이다. 홍태식 씨(54세)가 횟집을 시작한 것이 1993년경이었으니 어언 15년이나 된 곳이다. 횟집의 상호도 예전 구전으로 불리던 똘똘개라는 마을 이름을...
-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귀산동에 있는 전통주 제조업체. 맑은 내일에서 생산하는 전통주들은 국내산 찹쌀과 헛개나무 열매를 이용하여 생쌀 발효 기법 및 저온 발효·저온 숙성 기법으로 오랜 시간 빚어 향과 맛을 유지한 것을 특징으로 한다. 전통주를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생쌀 발효 기법’으로, 누룩이나 곡물 특유의 냄새가 적고 다른 약주에 비해 필...
-
석교마을은 마산항으로 드나드는 각종 크고 작은 선박들을 볼 수 있는 마산항의 아가리에 해당한다. 현재 창원공단에서 생산되는 각종 상품의 대부분도 이곳을 거쳐 전 세계로 수출되는 등 물류 이동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바닷길이 일제강점기에는 황포돛배의 뱃길이었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흔히 석교마을 사람들은 황포돛배를 ‘장배’라고도 불렀는데...
-
1959년 9월에 발생한 태풍 사라호로 마을 저수지가 무너지는 큰 피해를 입었으나, 몇 년 동안 복구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마을 이장이었던 이종현 옹은 영세민 취로사업과 복구공사를 병행하기로 작정하였다. 정부의 취로사업 목적은 영세민들의 연명(延命)에 있었는데, 이종현 옹은 연명과 저수지 공사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고 여긴 것이었다. 이 시절은 봄에는 들로,...
-
석교마을에는 한국전쟁 당시 마을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 최창실 옹이란 분이 있다. 최창실 옹은 2008년 현재 89세로, 허리가 많이 휘어져 있어 거동이 불편하지만 당시 일어났던 일들을 비교적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최창실 옹은 현재 김해 진영 출신의 부인 사이에 아들 3명과 딸 둘 등 5남매를 두고 있다. 황해도 재령군 청천면 양대리 텃...
-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삼귀사람(귀현, 귀곡, 귀산 세 마을 사람을 일컬음) 하면 섬[島]사람부터 연상되었다. 마을 앞은 바다요 뒤는 험준한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어 타지 사람들에겐 섬 아닌 섬사람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196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귀산동의 면적은 10.6㎢에 인구는 3700여 명이었다. 바다를 끼고 있어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30여 세대이고, 나머지 사람...
-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귀산동에 있는 마산 수산업 협동조합에 속한 어촌계. 어촌계의 대표는 계장이며, 계원은 수산업 협동조합 조합원인 정 계원과 조합원이 아닌 준 계원으로 나누어져 있다. 어촌계는 옛 제1종 공동 어업인 마을 어업, 양식 어업, 정치망 어업 등의 어업권을 총유(總有)[하나의 목적물을 여럿이 공동으로 가지는 공동 소유의 한 형태]하고 있다. 따라서 개별 어...
-
석교마을로 가는 길은 길눈이 어두운 사람이라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길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창원과 마산의 경계인 봉암다리에서 적현로를 따라 두산중공업을 가로지르면 곧바로 해안도로가 펼쳐진다. 해안도로의 군데군데는 늘상 낚시꾼들이 차지하고 있는데, 오른편으로는 무학산 자락에 포근히 안겨 있는 마산시내가 한눈에 잡히며, 지척에는 마산만의 명물인 돝섬의 아름...
-
석교마을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키위라 부르는 참다래이다. 예전부터 석교마을을 포함한 귀산동 지역은 맛좋은 구실포도[일명 귀산포도]로 이름을 날린 곳인데, 이제는 질 좋고 맛 좋은 참다래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귀산동에서는 예전에 ‘대라’로 불린 조그만 구슬처럼 생긴 포도와 ‘칸베라’라 불리는 검은 껍질의 포도를 많이 생산하였다....
-
석교마을 언덕배기에 위치한 귀산동 603번지에서 50년 넘게 이 마을을 지키며 바다에서 반평생을 살아온 황은준이라는 분을 석교마을회관에서 만났다. 황은준 옹은 현재 76세로, 25세 때 여섯 살 아래의 부인과 결혼하였다. 황은준 옹은 고향 거제에서 24세에 처음 이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되었는데, 친형이 그 전에 이 마을에 들어와 터를 잡고 살았기 때문이다. 거...
-
석교마을 시내버스 종점이 있는 솔밭에서 500m 정도 포장도로를 따라가면 군사제한구역으로 민간인 출입을 금지하는 경고판이 나온다. 여기서 다시 100m 정도 비포장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해군 진해기지사령관 명의의 굳게 닫힌 철조망을 만나게 된다. 민간인의 출입은 여기까지다. 석교마을과 일제강점기부터 인연을 맺은 사연 많은 곳임을 이 안내경고판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
귀산본동에는 가야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까지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군이 있어, 귀산동의 해안선 끝자락에 자리 잡은 똘똘개마을 역시 그 연원이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귀산동 고분군이 위치한 곳은 진해시와 경계를 이루는 귀산동주민센터가 있는 곳의 북동쪽 야산 소나무가 울창한 산속이다. 귀산동 고분군은 창원분지 내의 가야시대 고분군과 비교·연구할 수...
-
정월 대보름 새벽 석교마을에서 가장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들은 부녀자들일 것이다. 정월 대보름날은 부녀자들이 새벽 일찍 일어나야 한 해 농사는 물론이고 한 해 일이 수월하게 잘 풀린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날이면 창원 지역의 여느 마을과 마찬가지로 석교마을 부녀자들은 오곡밥을 해서 먼저 부엌의 조왕신에게 밥을 차리고 도랑사구(큰 그릇)에 오곡밥을 가득 담아 나락뒤주 앞에 정성스레 상...
-
석교마을 603번지 는 조개를 캐서 한평생 생계를 이어 온 이말남(71세) 할머니가 사시는 곳이다. 이말남 할머니는 한평생을 바다 일로 고생만 하다 이제는 몸이 성치 않아 하루가 멀다 하고 병원 신세를 지면서 살아가고 있다. 젊어서 한 고생 때문에 골병이 들어서란다. 이말남 할머니가 태어난 곳은 일본군의 탄약창 건설로 부득이 모든 마을 사람...
-
“당시는 무엇 때문인지 몰랐지만 국민학교 운동장 한편에 고구마밭이 있었고 운동장 주변에는 피마자(아주까리)를 심고 매일 가꾸었는데, 세월이 지나 알고 보니 일본놈들이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기 위한 것이었제. 심지어는 소나무의 진까지 긁어 모아서 학교로 가져오게 하기도 하고 ‘도둑놈(도둑놈같이 식물의 열매가 몸에 달라붙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이라는 풀의 열매까지 가지고 오게...
-
석교마을에서는 아직도 장(醬)을 직접 담가 먹는 집이 많다. 또한 장을 신성한 음식으로까지 여기고 있다. 장맛은 한 해 동안 가족들의 입맛을 좌우하기 때문에 아무 날이나 함부로 담가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장맛이 없으면 국도 맛이 없고, 나물을 무쳐도 맛이 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좋은 날을 받아 담근다고 한다. 석교마을에서는 예전부터 집안마다 장을 담그는 날...
-
현재 귀산본동에 살고 있는 이종현 옹이 먹고살기 힘들었던 1960년대 진해에 와 있던 미고문단과 색다르게 인연을 맺게 된 사연을 들려주었다. 당시는 바닷가 마을이라 마을 부녀자들은 물때만 되면 바닷가로 몰려 나가 조개를 캐서 시장에 내다 팔아 식량을 구입하고, 또 자식들 학비를 조달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경기도 어디에서 미군이 구호물자를 영세민들에게 공짜로 나눠 준다는...
-
한자 이름인 석교(石橋)는 요즘에나 자주 불리는 마을이름이고, 예전에는 모두 ‘똘똘개’라고 불렀다. 현재는 이 마을 홍태식 씨가 운영하는 ‘똘똘개횟집’에서나 옛 이름의 흔적이 남아 있는 듯 보이지만, 아직 이 마을을 똘똘개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다. 비교적 젊은 사람들도 석교 보다는 똘똘개가 더 익숙하다고 한다. 마을에는 1700년대 건립된 돌다리가 있었는데, 마을을 가로...
-
정월 대보름이면 석교마을에서는 수백 년 동안 지속되어 온 불의 축제가 벌어진다. 산업화가 가속화된 1970~1980년대 우리나라 거의 모든 마을에서 정월 대보름과 관련한 세시풍속들이 사라져 갔으나 석교마을만큼은 달집 행사의 명맥이 끊이지 않았다. 그만큼 마을 사람들의 전통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단결심을 이해할 수 있다. 대보름 전날 오후부터 마을 청년들이 달집을 만들기 시작하는데,...
-
석교마을 부녀자들 중 나이 많은 분들은 하나같이 일제강점기 진해기지사령부가 들어서면서 누구나 많은 사연을 간직하게 되었다고 입을 모은다. 이 마을 정순악 할머니 역시 그 당시 통제구역에서 조개를 캘 때의 추억담을 풀어놓았다. 해군의 통제구역 내에는 조개가 무척 많아서, 해군 감시원을 피해서 조개를 캐다가 감시원이 오면 도망을 가고 감시원이 가면 또 가서 파는 일이 하루...
-
석교마을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는 형제횟집은 송영내(74세) 할머니의 큰아들 이진길(49세) 씨와 둘째 아들 이진규(44세) 씨가 인근 도시에서 회사 생활을 하다 마을로 돌아온 뒤 힘을 합쳐 집을 짓고 모친과 함께 연 횟집이다. 그것이 2002년이었다. 마침 이 해 가을에 태풍 매미가 덮쳐 집 1층이 아예 날아가 버리는 피해를 입어 부득이 2003년 다시 지어 횟집을 열...
-
창원시 귀산동 588-2번지 에는 88세의 노인 한 분이 살고 계신다. 문패에는 ‘유공자의 집’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바로 이두봉 옹이 혼자 외롭게 살고 있는 집이다. 이두봉 옹은 30세에 결혼하여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현재는 모두 출가하여 인근 도시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부인이 10년 전에 죽어서 혼자 지내고 있는 이두봉 옹은 젊...
-
석교마을 최초로 횟집 문을 연 곳은 바닷가 선창을 지척에 두고 있는 마을 끝집 선창횟집(귀산동 597번지)이다. 선창횟집은 원래 현재의 주인인 김경일(36세) 씨의 모친인 문근자 씨가 문을 열고 운영한 곳이니, 따지고 보면 2대째 횟집을 운영하고 있는 셈이다. 석교마을에서 가장 젊은 횟집 주인이기도 한 김경일 씨가 모친의 업을 이어 받은 데는 무엇보...
-
예전이나 지금이나 석교마을은 물론이고 귀산본동까지도 생업의 터전은 바다로, 이 바다를 텃밭으로 일구며 살아오고 있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해방 이후까지만 하더라도 조개 값이 나락 값의 배를 넘었으니 매일 조개를 캘 수 있는 마을 앞의 갯벌은 사람들에게 삶의 보고(寶庫)가 아닐 수 없었다. 심지어는 인근의 마산에 사는 부인들도 통통배를 타고 이곳에 와서는 낚시 미끼로 인기가 있는 각종...
-
석교마을과 귀산본동에는 호롱불과 관련하여 웃지 못할 사연이 있다. 1970년대 이 지역에 전기가 들어올 때까지 대부분의 집에서는 호롱불을 켜고 살았다. 그런데 색깔이 뿌옇기만 하고 밝지는 않던 호롱불 대신 경유를 쓰는 호야(램프)로 불을 밝힐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 값비싼 석유램프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사는 게 힘들었던 그 시절에 호야를 값싼 비용으로 사용할 수...
-
석교마을 590번지에 살고 있는 이봉규 옹은 부인과 함께 바닷가 한편에 비닐로 지어진 9.92㎡ 남짓한 홍합막을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한시도 떠나지 않는다. 마을 앞바다에서 짓고 있는 홍합농사 때문이다. 부부는 이 홍합막과 홍합밭, 곧 홍합양식장을 분주히 오가면서 하루를 보내야 한다. 여느 농촌의 노부부와 마찬가지로 자식들은 도회지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노구를 이끌고 힘...
-
석교마을 사람들은 물론 귀산본동 사람들은 누구나 웅남호에 대한 추억들을 갖고 있다. 황포돛배는 너무도 오래전 일이라 언제부터 언제까지 운항되었는지 정확한 연대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긴 시간이 지나 기억 속에서 잊혀 버린 것이다. 황포돛배와 동력선인 웅남호의 교체 시기도 사람들 간에 의견이 분분하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황포돛배가 더 이상 운항하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