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4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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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1989年馬昌地域罷業鬪爭 |
영어의미역 | Strike Conflict of Masan and Changwon Region in 1989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정호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89년 2월 2일 - 임금 투쟁 발대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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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파업 투쟁 |
관련 인물/단체 | 마산 창원 노동조합 총연합 |
[정의]
1989년 임금 교섭 시기에 마산·창원 지역 노동조합들이 벌인 파업 투쟁.
[역사적 배경]
1989년 마산 창원 노동조합 총연합은 임금에 관한 단체 투쟁에서 요구안을 공동으로 준비하고, 투쟁 일정을 통일시키는 등 공동으로 임금에 관한 단체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의 노동 탄압으로 인해 임금 단체 협상 교섭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파업은 사업장 안에서 전개되기보다 가두에서 전개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대기업들은 연대 투쟁의 고리를 끊기 위해 조기 타결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경과]
1989년 마산 창원 노동조합 총연합은 경남 노동자 협의회와 결합하여 마산 창원노동법 개정 및 임금 인상 투쟁 본부[마창 투본]를 구성하였다. 여기에는 마산 창원노동조합 총연합 가입 노동조합은 물론 다수의 미 가입 노동조합 외 민주 노동조합 추진 위원회까지 포함하여 총 65개 정도의 사업장이 참가하였다.
마산 창원 노동법 개정 및 임금 인상 투쟁 본부는 1989년 2월 2일 1만 2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발대식을 가졌으며, 3월 24일 마산·창원 노동 운동 사상 최대 규모인 2만 2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임금 투쟁 전진대회를 열고 본격적인 임금 투쟁에 들어갔다. 각 단위 노동조합은 마산 창원 노동법 개정 및 임금 인상 투쟁본부의 일정에 따라 3월 말부터 4월 초순까지 교섭에 들어갔으며, 4월 중순에 쟁의발생 신고를 하고 본격적인 투쟁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던 중 4월 24일부터 창원대로 투쟁이 터지고, 이에 따라 마산 창원 노동법 개정 및 임금 인상 투쟁 본부 산하 노동조합들의 파업 투쟁도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4월 24일 전후로 마산 창원 노동법 개정 및 임금 인상 투쟁 본부 산하 19개 노조가 일제히 파업 투쟁에 돌입하였다. 임금에 관한 단체 투쟁 파업은 창원 대로 투쟁과 맞물려 가두시위로 확대되었다. 특히 이 시기의 임금 투쟁은 파업이 아니면서 파업의 상태로 치닫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것은 노동 운동 탄압에 반발하여 작업을 거부하거나 총회, 집회를 매일 열게 됨에 따라 생산이 거의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결과]
마산·창원 지역의 1989년 임금 투쟁은 창원대로 투쟁으로 대표되는 연대 투쟁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4월 20일부터 5월 19일까지 약 한 달 사이에 마산 창원 노동법 개정 및 임금 인상 투쟁 본부 산하 사업장의 82.9%인 39개 노동조합에서 임금단체 협상이 타결된 것은 이를 잘 말해준다.
그러나 공동 투쟁은 5·3 동의대 사태를 계기로 위축되었으며, 그 결과 창원 대로 투쟁의 촉매제 역할을 했던 금성사 임금 투쟁이 각개 격파되었다. 이중 금성사 2공장 지부는 평택·구미·금성사 1지부가 직권조인 한 이후에도 파업 투쟁을 계속했으나 회사와 노태우 정권의 탄압을 극복하지 못하고 16명의 구속자와 수십 명의 해고자를 남긴 채 결국 해산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