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4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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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1993年罷業鬪爭 |
영어의미역 | Strike Conflict in 1993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정호 |
성격 | 노동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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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993년 |
종결연도/일시 | 1993년 - 1993년 파업 투쟁 종결 |
발생(시작)장소 | 경상남도 마산|경상남도 창원 |
관련인물/단체 |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현대정공노조|웨스트노조 |
[정의]
1993년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산하 노동조합이 벌인 파업 투쟁.
[역사적 배경]
1993년 문민정부를 표방하고 들어선 김영삼 정권은 경기 침체를 이유로 고통 분담론과 같은 여론 공세와 더불어 한국노동조합총연맹과 한국경영자총협회의 임금 인상 가이드라인 합의(4.7~8.7%)를 통해 강력한 임금 억제 공세를 폈다. 정권과 자본의 탄압은 특히 현대그룹 소속 노동조합들에 집중되었다. 한편 웨스트사는 2월에 있었던 기아기공 노동조합의 전국노동조합협의회와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탈퇴에 영향을 받아 전국노동조합협의회·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탈퇴를 포함한 임금단체협상안을 제시하며 노동조합의 굴복을 강요하였다.
[발단]
1993년 6월 4일 울산 현대정공 노동조합 김동섭 위원장이 납치 구금된 상황에서 임금교섭에 직권조인 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울산 현대정공 노동조합은 위원장 불신임과 쟁의행위를 결의하고 총파업투쟁을 선언했으며,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도 연대투쟁을 선포했다. 한편 4월말부터 임금단체협상 교섭에 들어갔던 웨스트 노동조합은 회사의 임금단체협상 개악안과 물량반출, 노조 간부 4명에 대한 징계위 회부 및 고소 고발로 노사 간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경과]
창원의 현대정공 노동조합은 1993년 6월 17일부터 부분파업에 들어갔다.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은 7월 7일 하루 11개 사업장에서 총파업을 강행했으며, 이에 대해 정부와 현대 자본은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 사무실의 압수 수색,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 및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지도부 사전 구속영장 발부 등으로 대응하였다.
7월 14일 교섭이 결렬되면서 울산과 창원의 현대정공 노동조합은 7월 19일부터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파업 이틀째인 7월 21일 현대정공 창원공장에 공권력이 투입되어 298명의 조합원을 연행하였다. 그러나 창원 현대정공 노동조합은 연행자 가족들과 함께 경찰서를 항의 방문하여 연행자 대부분을 석방시키는 한편, 사택을 거점으로 집회, 시민 홍보전 등을 펼쳐나갔다.
웨스트 노동조합의 투쟁은 1993년 7월 8일 회사가 직장폐쇄를 단행하면서 장기화되었다. 회사는 집행부 사퇴 및 퇴사,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과 전국노동조합협의회 탈퇴, 무쟁의 각서 제출 강요에 이어 조합원 28명에게 손해배상을 청구 하는 등 노동조합을 압박하였다.
[결과]
현대정공 노동조합은 울산의 현대계열사 노동조합들이 속속 단체협상을 타결하는 상황 속에서 1993년 7월말 구속자 2명과 수배자 2명을 남긴 채 회사측 제시안을 받아들였다. 웨스트 노동조합 조합원들은 투쟁 상황을 형상화한 집체극 「그래! 새날이 올 때까지」를 만들어 전국 순회공연을 하면서 끈질기게 투쟁하였고, 마침내 1993년 11월 16일, 직장폐쇄 131일 만에 1992년 단체협상을 유지하는 선에서 임금단체협상을 마무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