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20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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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未來-築城大監崔潤德 |
영어의미역 | As a Official of Building Fortress, Choe Yundeok Looked Forward to the Future. |
이칭/별칭 | 정렬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북면 내곡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배상현 |
[개설]
최윤덕은 한국사 개설서에도 이름이 나올 만큼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하지만 세종 때 압록강 상류에 침입한 오랑캐의 추장인 이만주를 토벌하고 성을 쌓아 자성군을 두어 4군 설치의 기초를 만든 인물 정도로만 짧게 설명되고 있다. 최근 지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최윤덕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일반인들은 최윤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실정이다.
무엇보다 최윤덕이 창원 출신의 인물이며, 창원에 묘소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또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할 때 삼군도절제사가 되어 참여하였다는 점, 조선시대 무인 출신으로 좌의정에 오른 인물이었다는 점, 세종이 그를 가리켜 ‘나의 제갈공명’이라고 칭할 만큼 늘 가까이 두고자 하였던 인물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대마도를 정벌하다]
대마도는 일본 본토보다 우리나라 남해안과 더 가까운 49.5㎞의 거리에 있다. 대마도 곳곳에는 우리 역사와 관련된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어 가까운 거리만큼이나 우리나라와 잦은 왕래가 있었던 땅임을 알게 하는 곳이다. 대마도는 면적이 좁고 토지가 척박하여 흉년이 들 때는 이곳을 근거지로 하는 일본인 해적들이 우리나라에 침입하여 백성들을 괴롭혔다. 이들은 적을 때는 20척, 많을 때는 500척에 이르는 대규모의 선단을 이루기도 하였다. 우리는 이들을 왜구라 부른다.
1419년(세종 원년) 5월 왜구들이 50여 척의 병선으로 침입하자 조선 병선 17척이 불타고 만호 김성길이 패전하였으며 그의 아들 김윤은 전사하였다. 5월 14일 상왕 태종과 세종이 선정전에서 유정현·박은·최윤덕·조말생·이명덕·허조 등을 불러 의논하였는데, 상왕이 “왜구가 여러 번 준동하니 변방의 우환이 크다. 만약 이를 쓸어 없애지 아니하고 침략을 받는다면 한나라 왕이 흉노에게 욕됨을 본 것과 어찌 다르겠는가?” 하여 대마도 정벌의 뜻을 나타냈다.
1419년 6월 초하루 최윤덕은 왕명을 받들어 내이포[현 진해시 웅천 제덕리]에 이르러 군사를 정비하고 대마도 정벌을 위한 정동군을 편제하였다. 삼군도체찰사 이종무는 9명의 절제사를 거느리고 거제와 마산포에서 출항하고, 삼군도통사 유정현과 삼군도절제사 최윤덕은 그 뒤를 이었다.
정벌군은 대마도주 도도옹와 소오사다모리[宗貞盛]에게 항복을 종용하고 적선 129척을 빼앗아 쓸 수 있는 20척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불살랐다. 적의 가옥 1,939호를 태우고 적의 머리 114급을 베고 포로 21인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중국인으로 잡혀온 남녀 131명을 구출하였다. 최윤덕은 군사들을 힘써 싸우게 하는 한편 적이 왕래하는 곳을 막으며 오래 머무를 뜻을 보였다. 그러자 대마도주도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마침내 천신산에서 항복하는 글을 올렸다. 이 후 조선 군사는 개선하였다.
[문무를 겸비한 장상의 일생]
최윤덕은 1376년(고려 우왕 2)에 창원시 북면 내곡리 무동마을에서 최운해 장군과 이씨 부인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눈에 푸른 광채를 띠고 있어 누가 보아도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음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여섯 살 되던 해 어머니를 여의게 되어 변방으로 떠나는 아버지 최운해는 아들을 양수척의 집에 의탁해서 기르게 하였다.
양수척은 거란이나 여진계의 후예들로 유목민적 습속을 지닌 종족으로 고려에 투항하거나 포로가 되어 머물렀는데, 그 수가 많아 고려 말 조선 초에는 정책적으로 여러 지역으로 분산 거주토록 하였다. 이러한 국가 정책으로 창원 지역에도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최윤덕이 열세 살 되던 해에 화살 한 촉으로 호랑이를 잡았다는 기록이 『국조명신록』에 나온다. 그리고 일 년 뒤, 아버지의 뜻으로 당대의 석학 권근(權近)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과 무술을 동시에 익히게 되었다. 권근의 문하에서 문무를 익힌 최윤덕은 1394년 회시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무과에 합격한 최윤덕은 21세에 함길도 이성 지방 수비의 명을 받고 2년 동안 아버지 최운해 장군 밑에서 국방의 소임을 맡았다. 그 해 경상도 영해의 반포 지방에 왜구가 침입, 아버지 최운해 장군과 함께 출전해 큰 공을 세우자 태종은 최윤덕에게 종5품의 벼슬을 내렸다.
1414년(태종 14) 아버지 최운해 장군이 세상을 떠나 상중에 있다가 3년의 복을 마치기 전에 기복의 명을 받고 조정에 나와 정사를 도왔는데, 이는 태종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지를 가늠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 후 1년 간 태인군수로 있다가 동북면 일대에 야인들이 침범하자 조정의 부름으로 야인들을 무찌르고 정3품인 절제사에 오르게 되었다. 1417년(태종 17) 최윤덕은 동북면 근무를 끝내고 한양으로 돌아와 무과 시험관을 맡아보다 세종이 즉위하자 삼군도절제사가 되어 삼군도체찰사 이종무와 함께 대마도 정벌에 나서 대마도주의 항복을 받아냈다.
서울로 돌아온 최윤덕은 시간이 있을 때마다 세종에게 성을 튼튼히 쌓아 적병을 막을 것을 진언하였다. 1426년(세종 8) 최윤덕은 정부의 말을 맡아 기르는 관리인 정2품의 사복시제조를 역임하고 도절제사가 되어 외직에서 근무하다가 의정부참찬이 되어 한양으로 돌아왔다. 1428년(세종 10)에는 병조판서에 오르게 되었으니 최윤덕의 나이 53세였다.
1433년(세종 15) 세종은 그동안 국경을 위태롭게 했던 여진족 추장 이만주의 토벌을 결정하였다. 이 때 최윤덕은 삼군절제사가 되어 서북면 정벌에 나서게 되었는데, 뛰어난 지략으로 서북면을 무사히 평정하고 돌아왔다. 세종은 이 일로 그를 우의정에 임명하였는데, 이는 무인으로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우의정이 되고 난 후에도 최윤덕의 국방에 대한 관심은 변함없었고, 서북면 일대가 시끄러워지자 평안도안무찰리사란 직함을 받고 다시 임지로 나가 서북면을 평정하였다. 1435년(세종 17) 다시 좌의정에 올랐는데, 그는 두 번에 걸쳐 사직소를 올렸다. 그는 사직소에서 무인으로서 북방의 오랑캐를 완전히 없애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병이 깊어 직책을 수행할 수 없음을 밝히고, 무인은 오로지 국방에 전념해야지 행정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소신으로 밝히고 있다.
그러나 세종은 끝내 그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그는 변방의 방위에 각별한 정성을 쏟아, 노구를 이끌고 다시 한 번 서북면으로 떠나 오랑캐들을 평정하고 도성으로 돌아왔다. 1440년(세종 22) 마침내 최윤덕은 세종에게 국방에 대한 마지막 충언을 올리고 그리운 고향 창원으로 돌아오게 된다. 말 한 필에 하인 한 사람만을 대동한 조촐한 차림이었다. 1445년(세종 27) 최윤덕이 병석에 눕게 되자 세종은 친히 어의를 보내어 병을 돌보게 하였으나, 그해 12월 초닷새 날 운명하니 향년 70세였다. 세종은 사흘 동안 나라 일을 보지 않고 그의 죽음을 애통해 하였고 정렬공(貞烈公)이란 시호를 내려 공덕을 기렸다.
[미래를 내다 본 축성대감]
최윤덕은 미래를 내다보는 밝은 눈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붙여진 별명이 하나 있다. 그것이 세종이 직접 붙여 준 ‘축성대감’이다. 세종이 “최윤덕은 나를 만나면 반드시 성을 쌓을 것을 말한다.”고 할 정도로, 그는 늘 축성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특히 충청·전라·경상의 하삼도 연안과 동북·서북 양도의 북방 변경을 방어하는 계책으로 축성을 강조하였다. 심지어 판서나 우의정, 좌의정의 높은 벼슬에 있으면서도 연안과 변방으로 직접 내려가 성을 쌓도록 독려하였다. 그만큼 최윤덕에게 붙여진 축성대감은 그냥 붙여진 별명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 국가가 태평한 날이 오래 되었으니 마땅히 한가한 때에 성곽을 쌓아 나라의 터전을 튼튼하게 하소서. 새와 짐승도 오히려 보금자리가 있어 외적을 방어하거늘 하물며 사람이오리까? 후세에 이르러 거룩한 임금이 나지 아니하고 또 어진 신하가 없으면 어찌 능히 오래 편안하겠습니까? 변경에 성을 쌓는 일은 만세의 강구한 계책을 위함이오니 늦출 수 없습니다.”
최윤덕의 축성론은 평화로운 때에 성을 쌓아 만약의 변고에 대비하여야 한다는 유비무환의 교훈을 담고 있었다. 그의 지론은 미리 준비하여 위용을 갖추고 있으면 적이 감히 넘보지 못한다는 신념에 근거하였다. 최윤덕의 주장은 앞날을 내다보고 겨레의 안위를 걱정한 실제적인 것이기도 하였다.
백년이 지난 뒤의 일이지만 율곡 이이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에 십만 양병설로 왜국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최윤덕은 그보다 100여 년을 앞서 왜국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최윤덕의 축성론은 이러한 준비론이 투영된 것이었다. “오늘날은 저희들끼리 서로 싸우고 있으나 전국이 통일되면 반드시 우리나라를 침범할 것이며 부산과 거제에 먼저 상륙할 것입니다.”라고 세종에게 아뢴 것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대마도를 정벌한 뒤에 참여한 장수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이 자리에서도 최윤덕은 “대마도가 정벌되어 왜구는 근신하고 있는 것 같으나 앞날을 알 수가 없습니다. 또 북방 야인들은 우리의 경계가 허술한 틈만 보이면 침노할 것이니, 이들의 방어를 위해서는 연안과 변경에 성을 쌓아야 할 것입니다. 성을 견고히 쌓아 놓으면 후손에게 전해져 후환을 끊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세종도 “그렇다. 적을 방어하는 데는 성보다 더 든든한 것이 없다.”고 하였고, 1421년(세종 3) 공조판서에 임명되자 이듬해부터 도성 수축의 공사가 시작되었다.
임종에 가까웠을 무렵에도 문병 차 방문한 김종서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일생 동안 성을 쌓고 방비에 만전을 기하려 하였으나 평안도에 완전하지 못한 곳이 있습니다. 미처 임금께 진언을 드리지 못하였으니 그대가 대신 진언하여 주시오.”라고 당부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세상을 떠났다. 과연 축성대감이라는 별명에 걸맞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전해지는 일화, 남겨진 유적]
최윤덕은 평소 무신은 국정에 참여해서는 안 되며, 오직 국방의 임무에만 충실해야 한다는 소신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래서인지 재상의 반열에 있으면서도 늘 스스로를 “일개 무신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가 임금에게 올리는 말 가운데 국방이나 군사에 관한 것 외의 다른 내용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이 같은 태도는 두 번의 사직소를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국사를 경영하고 음양을 조화시키는 일은 무신이 관여할 바가 아닙니다. 신을 오로지 국방의 임무에만 머무르게 하소서.” 그러나 세종은 항상 그를 ‘나의 제갈공명’이라고 일컬으며 가까이 있기를 바랐다.
최윤덕은 원만한 성품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당대의 장군 가운데는 그보다도 선배인 이름난 장수들이 있었지만, 그가 무관으로 정승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품성도 작용하였다. 우의정에 임명될 때 주변에서 “영상을 시켜도 마땅합니다.”라고 한 것은 최윤덕의 인품을 능히 헤아리게 하는 대목이다.
최윤덕은 경상남도 창원시 북면 내곡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세 때 회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등용된 이후는 대부분을 서울과 변방에서 생활하였다. 『청파극담』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공이 평안도도절제사로서 안주목사를 겸임하였을 때 공무의 여가를 틈타서 아문 옆의 빈 땅에 외(瓜)를 심어 손수 가꾸기를 좋아하였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송사 때문에 와서 채소를 가꾸는 공을 보고 ‘사또께서 어느 곳에 계시느냐?’고 물었다. 공이 청사에 있을 것이라고 대답하고는 들어가 관복으로 바꾸어 입고 나와서 송사를 처결하였다.” 최윤덕의 근면하고도 소박한 성품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최윤덕은 멀리 관직에 있으면서 자주 고향을 찾았다. 어머니의 묘소가 있기 때문인데, 여기에도 몇 가지 일화들이 전해진다. 정승이 되었어도 최윤덕은 언제나 고향을 왕래할 때는 말 한 필에 종자 한 사람만 데리고 왔다고 한다. 한 번은 문경에서 지방의 관리들이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 앞을 그냥 통과하게 되었다. 지방 관리가 무례한 놈이라고 종자를 잡아 매질하려다 정승임을 알고서는 창원 북면까지 찾아와 사죄하였다고 한다. 고향에 머물 때에는 이웃 사람들이 찾아와 뜰아래에서 절을 하면 버선발로 뛰어 내려가 친구 대하듯 반기고 술상에 마주 앉게 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이웃에 친근함과 자상함을 보였던 인물이었다.
최윤덕의 어머니 묘는 본가에서 3㎞ 가량 떨어진 백월산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최윤덕이 정3품 참찬 때인 1426년(세종 8) 묘비를 세웠고, 좌의정이 되었을 때 아버지 양장공이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정처인 이씨 부인은 정경부인으로 위호가 올라가게 되어 다시 비를 세우고 문인석까지 세웠다.
최윤덕 묘는 창원시 북면 대산리 사리실마을 동북쪽 구릉 부분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곳은 예로부터 백월산과 구룡산을 잇는 산맥의 중간으로 서향으로 뻗은 능선이 천주산을 바라보고 있어 일찍부터 명당지로 알려져 있었다. 조선 초기의 방형분으로 남북 5.8m 동서 4.6m 크기로, 묘 앞에는 상석이 놓여있다. 묘제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어 1992년 10월 경상남도 기념물 제121호로 지정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