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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2927
한자 酒都馬山-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이장환

[주도 마산의 탄생]

마산에서 청주 산업이 얼마나 유명했는지를 알려면 1924년 경상남도에서 발행한 마산의 공장 통계에서 보면 된다. 주조 공장이 6개, 장유 양조장 1개, 정미소 2개, 제면소 1개, 철공소 2개 등으로 나타나 있다. 개항 이후 제법 규모 있는 공장을 분류하였을 때 청주 주조장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일본은 조계지를 설정한 구역 내에 제일 먼저 조계지 끝 지점에 해당하는 일성 펌프 자리에 아즈마 주조장을 시작으로 하여 원마산까지 청주 주장을 만들었다. 이후 설립된 공장은 1920년대에 13개의 공장에서 4,400석을 생산하였으며, 이후 1928년에는 12개 공장에서 1만 1천 석을 생산하여 조선의 지역별 청주 생산 실적에서 부산 업계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하였다. 최초의 주조장은 1904년에 설립한 아즈마[東] 주조장이며, 1905년에는 원마산 서성동에 이사바시[石橋] 주조장이 설립되었다. 이밖에 1906년 장군동에 설립된 고단다[五反田] 주조장, 같은 해에 청계동에 설립된 엔무[永武] 주조장, 1907년 홍문동에 설립된 니시다[西田] 주조장, 1908년 상남동의 오카다[岡田] 주조장, 1909년 장군동의 지시마엔[千島園] 주조장 등이 있다.

당시 마산의 주조장은 일제 강점기하에 내수용에서 시작하여 만주와 중국 대륙에 수출용까지 생산하게 되어서, 1938년 2만 석을 넘겼다고 한다. 그러나 1939년 가뭄으로 인한 쌀 수확의 흉작으로 사용량을 제한하여 당초보다 20% 줄인 1만 7천 여 석만 제한 생산하였다.

이후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전시 통제령에 의해 생산량을 제한받아 생산품도 군수용과 일반용으로 지정하여 생산 공급하였다.

[근대화·산업화 과정의 주류 문화]

해방과 함께 적산 공장의 불하에 의해 탄생된 소화 주류와 야마무라 주조 외에도 1951년 강남 소주가 장군동에서, 1961년 마산 양조 공업사에서 소주와 약주를 함께 생산하였다.

1961년에 유원(有元)·무학(舞鶴)·마산(馬山)·강남(江南) 4개 공장에서 소주를 제조하고 있었으나, 소주 수요가 늘어나면서 1970년에는 무학·강남·백광·삼천리·영진(永進) 등 5개 공장으로 늘어났다. 후발 업체인 백광 소주가 1969년에, 삼천리와 영진 소주는 회원동오동동에 설립되었다.

1965년 1월부터 시행된 양곡 관리법 시행으로 소주의 원료 대체가 불가피하게 됨에 따라 전국의 수많은 증류식 소주 업체들이 희석식 소주로 전환하여 생산하였다. 그 후 필요 이상으로 난립 상태였던 소주 제조장에 대해 국세청은 1973년 7월부터 본격적인 통합 작업에 착수하였다. 각 도에 1개 회사씩 전국 10개 업체만 존속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무학 주조는 경남 지역 36개 회사를 통폐합, 상호를 무학 주조 주식회사로 변경하고 신창동으로 이전하였다.

광복 후 맥주 시장은 본격적으로 치열한 각축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1975년에는 한독 맥주에서 마산에 독일식 맥주를 표방한 ‘이젠백(Isenbeck) 맥주’를 출시한다. 한독 맥주는 막대한 광고비를 투입하며 양사 체제의 맥주 시장에 틈새를 벌리며 15%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한다. 당시 시장 점유율을 보면 오비 맥주 51.7%, 크라운 맥주 32.9%, 이젠백 맥주 15.4%였다. 그러나 조선 맥주와 동양 맥주의 치열한 견제에 따른 과도한 출혈로 ‘이젠백’은 시장에 뿌리내리지 못한 채 대표자가 불법 외화 유출로 구속되는 등의 이유로 결국 조선 맥주에 흡수 합병된다.

1977년 조선 맥주는 한독 맥주를 인수해 사세를 확장했으며, 1993년에 하이트(Hite) 맥주를 출시하면서부터 연 70% 이상 육박했던 오비의 점유율이 급격히 추락했다. 급기야 1996년 맥주 시장에 놀라운 일이 생긴다. 만년 2위였던 조선 맥주가 하이트 맥주 하나로 1위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한국 맥주사에 일대 마케팅 혁신을 만들어낸다.

[문화[통술·아구·복] 거리의 발전]

조선 시대 마산은 동해의 원산, 서해의 강경과 함께 전국 3대 수산물 집산지 중 하나였다. 마산 어시장은 1960년대까지 남해안의 수산물 집산지이자 교환의 중심지였으며, 1990년대까지도 전국 최대의 거래량을 자랑했다. 자연스럽게 생선류가 안주나 요리로 발전할 수 있었다.

‘통술’은 한마디로 싱싱하고 푸짐한 각종 해물 안주가 한상 통째로 나오는 술상이다. 처음 가득 차려진 술상에 입맛 당기는 안주가 가득한데도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맛있는 안주가 줄을 잇는다. 안주의 주종은 마산 어시장을 코앞에 끼고 있는 만큼 싱싱한 해산물이 단연 으뜸이다. 볼락 회·꽁치·해삼·전어·아귀 수육·조개·산낙지는 물론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친 오징어와 주꾸미·갈치·볼락 구이와 각종 조림 맛도 술맛을 더한다.

마산의 통술집 원조 거리는 1970년대부터 오동동합성동 골목이었지만, 지금은 ‘신마산 통술 거리’가 생겨 상권이 상당히 이동했고 신마산 등지에는 17곳이 성업 중이다. 물론 마산 오동동 통술 골목에도 옛 명성을 그대로 이어가는 통술집 14곳이 여전히 건재하다.

푸짐한 안주와 함께 맥주 세 병이 기본으로 차려지는 술상은 기본 술값만 지불하면 안주는 배가 불러 먹지 못할 정도로 계속 나온다. 따라서 미리 술 먹기 위해 따로 식사를 할 필요도 없고, 2차로 자리를 옮겨 입가심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않도록 한방에 통째로 즐길 수 있는 것이 마산 통술 거리의 가장 큰 경쟁력이다.

1950년대 피난민을 중심으로 아구 생선을 먹기 시작했다. 아구로 국도 끓이고 수육도 만들어 팔다가 그래도 고기가 커서 남은 것들을 말려 간간한 양념으로 찜을 해먹은 것이 아구찜의 시작이었다. 어려운 시절 우리 국민들이 스스로 개발한 음식으로 6·25 전쟁으로 부산에 내려 온 피난민과, 먹을 것이 부족했던 당시 부산 시민들에게 저렴한 가격에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 고마운 식재료였다. 생선 가운데 가장 쌌던 아귀[당시 자갈치 시장에서는 ‘물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었다]는 무와 파를 넣고 끓이면 시원한 맛이 일품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아구는 국거리로, 살은 양념장에 찍어 수육으로 일반 가정집에서 흔하게 먹었던 생선이었다.

마산 아구찜은 1965년 마산 오동동에서 갯장어 식당을 하던 일명 ‘혹부리 할머니’가 된장·고추장·마늘·콩나물·파 등을 섞어 쪄서 만든 것이 시초가 되어 아구찜이 탄생했다고 알려져 왔다. 아구찜을 주문하면 기본적으로 ‘건아구찜’과 함께 갓김치, 데친 미역, 동치미가 나오는데, 매콤하게 조리된 아구찜의 맛을 상쇄시켜 주는 찬으로 구성했다. 또 한 가지 독특한 것은 아구 속젓이 함께 나온다는 것. 뜨거운 공기밥에 비벼먹으면 별미이다.

창동·오동동 쪽으로 향하면 자연스레 복국 골목, 아구찜 골목이 눈에 들어온다. 복국 역시 통영이 유명하지만, 1960년대 남성 식당 등이 개업하면서 일부 복국 전문점은 그야말로 생물 복국의 ‘극한’을 보여주면서 어시장 인근에서 복국 거리를 형성하였다.

[문화 거리와 명물 식당]

우선 문화인들이 즐겨 찾던 창동의 고모령 식당이 단연 시대를 풍미하던 명물 식당이었다. 삼천포가 고향인 문 여사. 그녀가 마산에 처음 터를 잡은 시기는 대략 1975년경이다. 그리고 ‘고모령’이란 옥호(屋號)로 선술집을 처음 시작한 시기는 1979년부터이고 장소는 창동 골목이다. 구체적인 위치는 창동 옛 오행당 약국 건너편 골목 2층의 카페 ‘해거름’ 바로 맞은편, 지금의 ‘오곡 보리밥’ 식당 바로 옆이다. 사실 ‘고모령’이란 이름을 내걸고 시작한 선술집이 무려 세 군데이다. 맨 처음이 창동 골목의 ‘고모령’이고, 두 번째가 부림 시장 골목의 수성동 ‘고모령’, 그리고 세 번째가 서성동 ‘고모령’이다.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가 힘들고 가난했던 그 시절에 ‘고모령’이란 간판을 내걸고 주로 막걸리를 팔았지만, 코딱지만한 가게를 세 번이나 옮겼다는 말은 그만큼 장사가 잘 안 됐다는 반증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가난했던 예술인들을 따뜻하게 보듬었고 술 취한 서민들의 말 상대가 돼 주었으니 ‘고모령’을 불후의 선술집이라 하는 것이다.

부림 지하상가 먹자골목 초입에는 옛 ‘성광집’이 있다. 이영자 시인이 운영했던 식당 겸 선술집이다. 그곳은 아직도 새 주인을 찾지 못했는지 문이 굳게 닫혀 있다. 간판 위에는 ‘마시고 죽자’란 장난기 어린 문구가 선명하게 남아있어 그곳이 선술집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어디 그뿐이랴. ‘징그러운 것 중에 으뜸이 인간이다.’와 같은 온갖 글귀들이 난해한 추상화처럼 꽁꽁 닫혀있는 문짝을 도배해 놓고 있어 이곳이 ‘예술인들의 쉼터’였음도 입증해 주고 있다.

동서 화랑 관장 송인식, 수필가 신상철, 시인 황선하·이광석·오하룡·이선관·홍진기·김미윤, 화가 김대환·남정현·현재호·변상봉·허청륭·안실영, 사진작가 나상호, 영화인 이승기, ‘고모령'의 문 여사, ‘만초집’의 조남륭 등 기라성 같은 예인들과 명사(名士)들이 ‘성광집’ 단골이었다.

마산에서 클래식을 제공하는 선술집은 ‘만초’의 조남륭이다. 창동에서 30여 년 동안 클래식을 고집하는 작은 술집이 아직도 운영되고 있다. 1973년부터 ‘음악의 집’이라는 제목으로 개업하여 지금 ‘만초’라는 이름으로 운영해온 70대의 조남륭은 가게 앞에는 “술과 소리가 있소이다. 그냥 갈랑겨”라는 글귀가 쓰여 있는 것처럼 1980년대까지만 해도 조두남·정진업을 비롯하여 우리 지역의 유명 예술가들이 찾곤 하던 명소였다. 서울로 유학을 간 대학생들이 방학을 맞아 고향에 내려올 때쯤이면 이곳은 동문회가 열릴 정도로 왁자지껄한 풍경이 연출되곤 했다. 아직도 가게의 벽에는 1970년대의 클래식 연주 공연 그림의 대형 사진과 이곳을 거쳐 간 사람들의 스냅 사진 100여 장이 빛이 바랜 채 지키고 있다. 지금도 토박이 예술인들의 근황을 물어보려면 조남륭 사장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칠순을 훌쩍 넘긴 이런 이들이야말로 우리 지역의 살아있는 문화재로 창동 거리와 함께 남아있다.

[마산 주류 문화의 전망]

마산의 주류 산업은 소주 분야에서는 전국 2위를 달리는 기염을 토하며 주도 마산의 명성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다. 무학 주조가 영남 지역은 물론이고 수도권에서도 선전을 하고 있으며, 맥주의 경우도 하이트 맥주를 중심으로 1977년 이후 35년 이상의 전통을 지키면서 그야말로 주도 마산을 알리고 있다. 하지만 전통주인 막걸리와 청주의 경우에는 아쉽게도 쇠퇴하여 마산 막걸리가 자취를 감추고 합동 양조장이 함안으로 이전하였다. 청주 공장도 이미 사라져 버린 지 오래되었다. 해방 이후 진로 소주는 진전 지역에서 포도주를 생산하였지만 지금은 마산 지역에서 중단되었다.

이처럼 마산의 주류 문화는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면서 꾸준하게 부침을 계속하여 왔다. 창동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 재생 프로젝트와 더불어 오동동창동 예술촌 중심 문화 공간에서 막걸리촌을 비롯하여 젊은이들이 찾을 수 있는 서민의 술집들이 모여들고 있다. 젊은이들 중심의 거리는 합성동해운동을 중심으로 이전되면서 마산의 주류 문화는 보다 다양한 형태로 확산되어 가고 있다. 앞으로의 주류 문화는 고모령·만초 등의 과거에 번성하였던 문화 중심의 명물 식당들이 새로운 형태로 발전하며 부부 중심의 가정 지향적인 음주 문화가 만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특히 어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복국 거리와 장어 거리 그리고 신마산을 중심으로 새롭게 발전하여 완전히 터전을 내린 통술 거리창동과 더불어 바다가 있는 항구도시 마산이 앞으로 지향해야 할 마산의 주류 문화에 대한 시사점을 보여준다. 나아가서는 아구찜의 현대적인 해석이 필요하며 이러한 음식과 더불어 마산의 주류 문화는 독창적이고 마산적인 것을 만들어갈 것이다. 특히 2006년에 개설된 마산 대학교의 음료 문화 학부의 주류 전문 전공인 국제 소믈리과에서 와인과 발효주, 특히 전통주 등을 공부하는 학생을 배출하게 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며 주도 마산의 길고 긴 인연과 맥을 같이한다고 보여진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마산의 주류 문화는 그 원형질을 간직한 채 또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보다 원숙해지면서 새로운 주류 문화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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