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2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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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信-藝術世界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효진 |
[들어가는 말]
화가에서 시작하여 조각가로 예술의 전성기를 누렸던 문신(Moon Shin)[1923~1995]은 프랑스라는 낯선 땅에서 긴 고독과 싸우며 예술가의 끈질긴 열정과 집념으로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이룩하였다. 그는 한국 모더니즘 회화의 선두 주자로서 한국 화단에서 화가로서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프랑스로 건너간 이후 흑단·주목 등의 단단하고 강한 재료를 갈고 닦아 만든 특유의 생명감 넘치는 조각으로 세계 무대에서 한국 미술의 우수성을 널리 알렸다. 영구 귀국하여 고향 언덕배기 추산동[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추산동] 언덕에 14년 동안 그가 손수 건립한 문신 미술관은 그의 예술의 결정체이자 후손들에게 남긴 크나큰 예술적 유산이 되고 있다.
50여 년의 긴 예술의 여정 속에서 한국 미술계와 지역 미술 문화 발전에 큰 업적을 남긴 작가 문신의 삶과 예술세계, 그의 활동 전반을 폭넓게 살펴봄으로써 차후 문신 예술 세계 연구를 위한 귀중한 기초적 자료로 활용될 수 있기를 바란다.
[성장 배경]
문신은 1922년 1월 16일 일본 규슈의 온천이 많은 탄광 지역 다케오 사가현에서 한국인 아버지 문찬이와 일본인 어머니 차와타다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5세 때 부모님과 함께 마산으로 건너왔으며 그 후 1930년 어머니는 일본으로 다시 떠났고 그로부터 평생을 어머니와 떨어져 고독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유년 시절부터 남달리 호기심이 많았고 자립심과 독립심이 두드러진 성향을 띠었다. 작가이기에 앞서 문신이라는 한 인간의 일생을 돌아 봤을 때 그의 삶의 과정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다. 그러나 그는 현실적 한계와 주어진 환경을 묵묵히 극복해 내는 긍정적인 사고를 하였기에 그러한 현실의 환경과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다이내믹한 여러 가지 경험들이 그를 평면 작품에 머무르지 않고 조각가로서의 기질에 필연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문신의 조각 작품 세계는 그의 일련의 삶의 과정처럼 강한 재료와의 치열한 싸움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되며, 이러한 성향은 일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현실에 충실한 삶을 살았고 예술가적 기질이 풍부한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넉넉지 않았던 가정환경 속에서 13~14세의 나이에 마산·진영 등지를 다니며 시내 주요 영화 개봉관의 간판 그림을 그려 돈을 벌었다. 마산에서 보통학교를 마칠 무렵부터 화가가 되겠다는 뜻을 품었던 문신은 그의 환경이 화가가 되기에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1938년 미술 공부를 위해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밀항하게 된다. 그곳에서 극장의 간판 그리기, 무대 장식, 포스터 제작 및 배달, 애니메이션 작가, 영화배우 등의 여러 가지 직업으로 생계를 꾸렸으며, 동경의 일본 미술 학교[정식 명칭은 니혼 예술 대학]에 입학하여 서양화를 공부하게 된다. 귀국 후 마산 중등학교 교사로 일했고 이후 마산에서 산을 깎아 골프장[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추산동 54-3 현재 문신 미술관 원형 미술관 건립 중인 터에 위치]을 짓는 일에도 참여하여 건축적인 경험을 습득하게 된다.
[화가로서 문신]
1945년 해방과 함께 귀국한 문신은 1961년 프랑스로 건너가기까지 마산을 중심으로 서울·부산·대구 등 국내 화단에서 화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게 된다. 그는 인상파·입체파·야수파 등의 서구 사조를 흡수하여 다양한 양식과 기법을 실험하면서 탄탄한 데생 실력을 기반으로 한 사실화 계열의 유화 작품을 주로 창작했다.
화가로 활동할 때에도 문신은 조각가로서의 내재된 기질을 어김없이 드러내는데 유화 「고기잡이」·「뒷산과 하늘」·「닭장」·「아침 바다」·「붉은 벽돌집이 있는 풍경」·「정물」 등의 유화 작품의 액자를 나무에 조각을 하여 직접 만들었다. 유화 「고기잡이」의 액자는 물속에서 유연하게 헤엄치며 창으로 물고기를 잡는 여인들, 그물망을 메고 가는 여인들의 인체를 볼륨 있게 부조 조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마치 원시 시대의 수렵 생활을 떠오르게 하는 원초적인 풍경이다. 특히 창원 시립 마산 문신 미술관에서 소장 중인 부조 목조 조각 「어부」는 출렁이는 파도를 뒤로한 채 힘차게 그물을 끌어올리는 어부들의 건강한 모습을 아주 역동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조각가로서 문신의 잠재성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대표 작품이다.
문신이 한국에서 활동했던 시기의 마산 화단은 6·25 전쟁을 계기로 하여 전국 각지에서 피난 온 미술인들의 활발한 활동으로 미술의 중심지가 될 만큼 활발한 양상을 띠었으며, 문신이 프랑스로 떠나던 시기에 즈음하여 쇠퇴하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문신은 새로운 곳으로 활동 무대를 넓히기 위한 도약으로 작가로서나 개인사로서나 새로운 출발을 위해 파리 행을 감행하게 된다.
[파리의 문신]
문신은 1961년 2월 초 홍콩을 경유하여 파리에 도착하게 된다. 평소 알고 지내던 이응로 화백의 소개로 파리에서 활동 중인 김흥수 화백을 만나게 되고, 그로부터 파리 서북쪽 85㎞ 떨어진 라브넬(Ravenel)성을 소개 받는다. 그곳에서의 일은 옛 성을 수복하는 일이었는데 돌을 깨고 오래된 것을 새 것으로 끼워 넣는 작업이었다. 그것은 석공·목수·미장이 일은 물론이고 성탑의 지붕 일까지 도맡아 해야 하는 힘든 일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축적인 일에 일찍부터 경험이 있었던 문신에게는 낯선 일은 아니었다. 아래의 작업 노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라브넬 고성 수리장에서 석공으로 일하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돌을 만지는 경험이 자연스럽게 조각에 흥미를 갖게 한다.
“나는 이곳 파리에 온 그날부터 우선 제작을 위한 생계를 돕고자 옛 석조 건물의 헐은 돌들을 뜯어내고 새 돌 또는 흰 시멘트에다 광물성 물감을 혼합하여 옛 돌과 같은 빛깔을 내어 붙여, 굳은 뒤에 다듬고 쌓아 올리는 일을 했었다. 무척 힘들고 고된 작업임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작업 과정으로 나는 즐기면서 일할 수 있는 구축적 조각 방식을 취하고 있다.”[『문신의 삶과 예술 세계 평론집 Ⅰ』 64쪽]
문신은 프랑스에 온 후 전후 유럽에서 주를 이루던 앵포르멜 추상 회화의 영향으로 구상 회화를 완전히 벗어나서 1961년부터 본격적 평면 추상 작업에 전념하였다. 1960년대 중반 이후의 회화에 이르면 대칭 구조의 형상이 서서히 화면에 나타나면서 점점 조각의 형태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러한 추상 회화 작업은 본격적인 조각 작업 전환 이후에도 계속되며 1990년대까지 조각과 함께 병행한다.
문신은 라브넬 성을 깨고·쪼고·붙이고 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조각가로 전향하게 되는데, 유년 시절 숱한 아르바이트와 갖가지 경험들이 조각가로서 문신의 기질을 키우는 기반이 되었다면 성의 수복 작업은 본격적인 조각가로서 물고를 트게 했다.
문신은 프랑스에서 온갖 시련을 극복하면서 점차 조각가로 성장해 나간다. 장 크라방과의 만남으로 1969년 남 프랑스 뺄빼냥(Perpignan) 뽀르 바카레스(Port-Barcarès)에서 열린 국제 조각 심포지엄에 참여하여 「태양의 인간」을 발표하면서 세계무대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으며, 1971년 스위스의 바젤아트페어에 출품한 전 작품들이 매진되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 「태양의 인간」은 높이 13m, 직경 1.3m, 무게 7톤이 넘는 거대한 아프리카산 목재 아비동(apiton)을 통째 깎아서 만든 구축적 조각으로 문신은 국제 조각 심포지엄에 세계 각국 15명의 작가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인간이 숭배해 오고 찬양해 왔던 태양을 주제로 하여 바카레스 해안에 작품을 세우게 되었고, 40년이 지난 지금도 지중해 연안 뜨거운 태양 빛 아래 영구 전시되어 있다.
문신은 1972년 세계 최초 지하철전에 대형 석고 조각을 출품하여 휘가로지의 표지에 작품이 실리기도 하였고, 프랑스 3TV에서 문신의 예술 세계가 30여 분간 방영되었다. 프랑스 저명 미술 사학자 시즈롱 여사는 문신 예술 세계를 본격 연구하였으며, 저명 평론가 자크 도판느도 문신 예술 세계를 본격 탐구하였다.
1973년에는 유년 시절부터 존경해 오던 피카소를 추모하는 대형 폴리 조각을 살롱 드메(Salon de Mai)에 출품하였는데, 이 작품이 격찬을 받으며 이후 5대 살롱전에 고정으로 작품을 출품하였다. 문신은 영구 귀국 때까지 150여 회에 걸친 각종 국제전과 살롱전·그룹전·개인전에 연속으로 출품하면서 파리를 중심으로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화단에서 활발한 문신의 시대를 열었다. 1979년에는 파리 시립 미술관에서 문신의 작품을 구입하였으며 현대화랑 초대전 이후 본격적으로 영구 귀국을 준비하였다.
[다시 한국으로]
문신은 1978년 프랑스 주재 한국 대사관에서 당시 독일 괴팅겐 대학에서 어학 연수 중인 최성숙을 만나 꿈에도 그리던 마산으로 영구 귀국하게 된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면서 쌓았던 명성들과 보장된 미래를 모두 버릴 정도로 미술관 건립이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문신은 추산동 미술관을 직접 설계했으며, 아내 최성숙과 함께 척박한 땅에 건립의 첫 삽질을 시작한 후 14년여의 세월을 견디면서 1994년 필생의 소원인 미술관을 개관하게 된다.
이렇게 문신 미술관의 역사를 하나하나 알아가다 보면 미술관의 돌 하나 나무 한 그루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미술관 야외 조각장의 바닥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반듯한 대리석 역시 작가가 직접 디자인하고 잘라 붙여서 만든 귀중한 작품들이며 거대한 자연석을 그대로 살린 폭포와 분수 또한 그러하다.
8,250㎡의 야산을 깎아서 미술관이라는 큰 작품을 해나가는 동안 어느 누구의 도움 없이 오로지 독자적인 힘으로 건립하고자 하였다. 긴 세월 동안 그 어려움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많았겠지만 이 과정에서 문신은 단 한 번도 창작 활동을 멈춘 적이 없으며, 매일 밤 오늘이 생의 마지막 날일 수도 있다고 하면서 깨끗한 옷을 갈아입고 잠자리에 들면서 자기 예술에 충실코자 하는 눈물겨운 역정을 그대로 보여주었다고 최성숙은 회고하고 있다.
문신은 미술관 건립과 함께 전시 활동에도 박차를 가했다. 귀국하여 현대 화랑·미화랑·신세계 화랑·예화랑·한국 화랑 등 주요 화랑에서 전시회를 개최했으며, 서울 올림픽 행사의 일환으로 개최된 예술 올림피아드에 25m 높이의 스테인리스 스틸 대형조각 「올림픽 1988」을 세웠다. 1989년 파리 아트 센터에서 개최한 ‘플레쉬 백’[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전]에 소토, 데니카라반, 데니스 오펜하임 등 세계적인 거장들과 함께 참여하였으며, 1990~1992년 유고 자그레브, 사라예보, 헝가리 부다페스트, 프랑스 파리 시립 미술관에서 대규모 동·서 유럽 회고전을 갖게 되었다. 문신 미술관 개관 1년 후인 1995년 72세의 나이로 문신은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그의 염원이던 석고 원형 전시회는 보지도 못하고 그의 유작전이 되어버렸다.
[나가며]
문신은 이러한 찬란한 부활을 꿈꾸었을까? 문신이 타계한 지 20여 년이 되었지만 그의 예술 세계는 끊임없이 재조명되고 있다. ‘1997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특별 초대전’을 비롯하여 문신 미술상 운영[2003년~], 2005 스페인 발렌시아 비엔날레, 2006 독일 바덴바덴 문신 전시회, 2010 문신 국제 조각 심포지엄이 개최되었고, 그토록 애착을 가졌던 아름다운 백색의 석고 조각들이 전시되는 원형 미술관이 2010년 10월 개관하였다.
2006년 독일 바덴바덴 문신 전시회를 즈음하여 문신 예술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먼 독일 땅에서 문신의 조각이 음악으로 창작되었으며, 2007년 독일에서는 바덴바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문신을 위한 미술 영상 음악회’가 성대하게 개최되기도 했다. 문신의 작품이 평화와 화합, 사랑을 이야기해서일까? 그의 작품은 다른 예술 분야와도 잘 어우러진다. 그의 예술은 시·시나리오 등의 문학으로도 창작되고 있으며, 그의 조각 및 드로잉의 주옥같은 보석으로의 탄생을 비롯하여 각종 패션 상품들로도 디자인되어 사랑받고 있다.
문신 미술관은 2003년부터 고인의 뜻을 받들어 시에 인도되어 시립 미술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제 문신 미술관은 공공 미술관으로 시민의 자랑거리로서 더 큰 세계로 영역을 넓혀가기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으며, 수년이 지난 후에 그 결과를 지켜볼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