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51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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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鎭海石洞農民抵抗 |
이칭/별칭 | 돌리 헛난리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남재우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12년 5월 19일 - 진해 석동 농민 저항이 일어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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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 장소 | 진해 석동 농민 저항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석동 |
종결 장소 | 진해 석동 농민 저항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석동 |
성격 | 항일 농민 운동 |
관련 인물/단체 | 석동이장 배효준|일본인 쇼오고[詳吾]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석동 뒷산 마을 공유림을 둘러싼 석동 주민들의 항일 농민 운동.
[개설]
일제 강점기에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석동 뒷산에는 농우(農牛)의 목초지로 사용되는 마을 공유림이 있었다. 이 산림을 마산 부윤 미마쓰[三增久米吉]의 아들 쇼오고[詳吾]가 다년생 소나무를 벌목하고 과수원을 만들었다. 이에 석동 농민이었던 이장인 배효준을 비롯한 김시영, 우휘수 등이 쇼오고[詳吾]의 과수원에 식목을 하고 그를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1912년 5월 19일에 배효준의 연락으로 80여 명의 장정들이 쇼오고[詳吾]의 과수원에 심어져 있던 과수를 빼버리고 대신에 버드나무를 심었다. 이에 쇼오고[詳吾]는 진해 경찰서에 이 사실을 고발함으로써 발생한 사건이다.
[역사적 배경]
일본의 식민 통치가 시작되면서 토지 수탈을 위한 토지 조사 사업이 진행되었고, 이로 인하여 농민들이 경작하던 많은 토지들이 동양 척식 주식회사와 일본인 소유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농민들의 삶은 더욱 궁핍해져 소작 쟁의가 빈발하였으며, 이러한 경제적 투쟁은 농민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일제에 대한 농민 저항은 진해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경과]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석동 뒷산의 공유림을 마산 부윤의 아들 쇼오고[詳吾]가 점거하여 과수원을 만들자, 동민들이 과수원에 나무를 심고 그를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1912년 5월 19일 이장 배효준의 연락으로 80여명의 장정들이 과수원의 과수를 뽑아 버리고 그들이 가져온 버드나무를 심었다. 이에 쇼오고[詳吾]가 식목을 방해하자 석동 농민들은 불법 점유의 부당성을 주장하였다.
주민들의 반발에 쇼오고[詳吾]는 진해 경찰서 경화 주재소에 고발하여 일본인 순경 2명이 파견되어 식목을 제지하였다. 하지만 농민들은 경찰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식목을 계속했고 경찰은 총검으로 위협했다. 이에 농민들은 작업을 하던 괭이나 삽들을 들고 집단으로 항변하자 경찰은 도망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쇼오고[詳吾]는 급히 진해 경찰서에 이 사실을 고발했고, 경찰서는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하여 무장한 일본 경찰을 앞세우고 흉기를 소지한 일본인 의용 소방 조원과 거류민 등 약 300명을 동원하였다. 무장한 경찰관이 현장에 도착할 무렵 석동 농민들은 현장을 벗어났고, 경찰들이 총을 쏘면서 뒤쫓았으나 한 사람도 잡을 수 없었다. 밤이 되자 경찰관들은 농민들을 색출하려고 가택을 수색하였다.
이에 이장인 배효준은 경찰이 물러간 후 스스로 경찰서에 가서 거사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일본 경찰은 배효준, 배정헌, 배정구, 배정규 등 4명을 단순한 경찰 공무원 집행 방해죄를 적용하여 11개월의 징역형을 받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