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학도호국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8359
한자 慶尙北道 學徒護國團
이칭/별칭 경북 학도호국단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49년 3월 18일연표보기 - 경상북도 학도호국단 출범
최초 설립지 대구의대 운동장 - 대구광역시 중구 동덕로 130[삼덕동2가 50]지도보기
성격 학교 내 준군사 조직
설립자 문교부

[정의]

1949년 3월 대구광역시에서 정부 주도로 결성된 경상북도 지역의 준군사 조직.

[설립 목적]

학도호국단은 정부수립 이후 1948년 12월 반공정신을 기본 바탕으로 하는 일민주의 교육 이념 아래 문교부에 의하여 결성되었다. 학생들은 단체 훈련을 통하여 신체를 단련하고, 정신을 연마하여 학원 내에서 좌익 계열의 책동을 분쇄하며 또 민족의식을 고취시킴으로써 애국적 단결심을 함양한다는 취지에서 정부 주도로 설립되었다.

[변천]

학도호국단은 1949년 9월 28일 대통령령 제186호 ‘대한민국 학도호국단 규정’이 공포됨에 따라 국가기구가 되었다. 4·19혁명 이후 자치 학생회 건립을 내용으로 하는 학원민주화운동의 전개에 따라 폐지되었다가, 1975년 유신체제에서 복원되었으며, 1985년 다시 폐지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경상북도 학도호국단은 1949년 3월 18일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2가 대구의대 운동장에서 출범하였다. 출범식에는 문교부 장관이 참석하고, 학교 단위의 호국단 63대와 지방 시·군 단위의 학도호국단 중대장 이상의 대표 등 20,0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경상북도 학도호국단의 간부들은 1949년 4월 23일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구내 훈련소에서 실시 예정인 2주간의 훈련을 받기 위하여 입소하였다.

경상북도 학도호국단은 대구와 경상북도 도내 중등학교 이상에 설치될 학도호국단을 총괄하고, 중앙학도호국단의 경상북도 조직으로 운영되었다. 경상북도 학도호국단의 단장은 경상북도 도지사가 맡고, 부단장은 도청의 문교 사회국장이 당연직으로 임명되었다. 각급 학교 학도호국단의 단장은 학교장이 맡고, 부단장은 교감이 맡았다. 또한, 경상북도 학도호국단과 각급 학교 학도호국단에 호국단 운영과 관련된 중요 사항을 심의하는 지도위원회를 두고, 각 학교에는 대의원으로 구성되는 운영위원회를 두었다. 각급 학교에는 전체 학생을 대대, 중대, 소대로 편성하고, 모두 학생들로 간부를 임명하였다.

경상북도 학도호국단은 1949년 6월 18일 학도호국단 운영에 있어 풍기와 기강을 바로잡는다는 미명으로 경상북도 학도호국단 학생감찰부를 구성하였다. 경상북도 학도호국단은 1949년 6월 25일 대구종합운동장에서 대구시 학도학국단 소속 1만 2000명의 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사열식을 거행하였다. 경상북도 학도호국단 학생감찰부는 각급 학교의 학생을 선발하여 1949년 7월 26일부터 2주간 육군 제22연대 입대 훈련을 실시하였다. 또한, 1949년 9월 20일 대구역 광장에서 ‘경북학생반공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경상북도 학도호국단 학생감찰부는 1950년 2월 22일부터 1주간을 ‘학도호국 정신 발휘 앙양 주간’으로 정하고 반공 사상의 계도, 풍기 정화를 위하여 여러 행사를 열었다.

경상북도 학도호국단6·25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7월 학도의용군을 편성하여 전투에 참가하였다. 학도의용군은 낙동강과 동해안 전투에 참전하였다.

[의의와 평가]

경상북도 학도호국단은 정부수립 이후 반공주의의 이념 아래 학원을 준군사 조직으로 편성한 경상북도 내 각급 학교의 상위 기관이었다. 경상북도 학도호국단은 이승만 권력과 자유당 정권의 정치 기반으로 활용되었다. 경상북도 학도호국단의 운영은 1955년 9월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이 나오게 된 배경이 되었고,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는 1960년 2·28민주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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