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4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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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楊時佐 |
영어공식명칭 | Yang Sijwa |
이칭/별칭 | 국경(國卿),명암(明岩),명암거사(明岩居士)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구본욱 |
출생 시기/일시 | 1616년 - 양시좌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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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686년 - 양시좌 사망 |
출생지 | 파동 -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 |
거주|이주지 | 파동 -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 |
묘소|단소 | 양시좌 묘소 -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 |
사당|배향지 | 경현재 - 대구광역시 동구 효동로2길 50[효목동 1108] |
성격 | 학자 |
성별 | 남성 |
본관 | 중화(中和) |
[정의]
조선 후기 대구 출신의 학자.
[가계]
양시좌(楊時佐)[1616~1686]의 본관은 중화(中和)이며,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명암(明岩)이다. 명암거사(明岩居士)라고도 불렸다. 아버지는 양경수(楊景洙)이고, 어머니는 동래정씨(東萊鄭氏)이다.
[활동 사항]
양시좌는 1616년(광해군 8) 지금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에서 태어났다. 1636년(인조 14)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항복시키고 인조(仁祖)가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자 청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를 숭상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양시좌는 향리의 유생 14인과 더불어 동구 도동의 속칭 대명동(大明洞)에 모여 친명배청(親明排淸)을 결의하고 각자 명(明) 자 운(韻)으로 연구시(聯句詩)를 지었다. 양시좌는 호를 ‘명암거사(明岩居士)’라 하고 “차마 중주[중국] 땅을 바라보니, 대명의 덕이 더렵혀졌구나[忍看中州土, 穢德汚大明]”라는 시를 지었다. 이때 결의한 사람들을 후세 사람들은 대명 14현이라고 일컬었다.
양시좌는 1658년(효종 9) 아버지가 사망하자 상례(喪禮)를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거행하여 향리에서 칭송을 받았다. 자식들에게 훈계하기를 “선비의 본분은 명성과 이익을 가까이 해서는 아니 되니, 너희들은 가난함을 달게 여기고 분수를 지키며 가문의 명성을 실추시키지 말라”라고 하였다. 1686년(숙종 12) 사망하였다.
[묘소]
양시좌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양시좌는 1882년에 후손들이 대명 14현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경현당(景賢堂)에 배향되었다. 경현재는 동구 효동로2길 50[효목동 1108]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