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6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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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玄緖 |
영어공식명칭 | Lee Hyeonseo |
이칭/별칭 | 치장(穉長),성수(星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임현채 |
출생 시기/일시 | 1791년 - 이현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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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16년 - 이현서 생원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840년 - 이현서 고양군수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41년 - 이현서 울산부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44년 - 이현서 증광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845년 - 이현서 사간원 대사간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51년 - 이현서 이조 참의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52년 - 이현서 성균관 대사성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53년 - 이현서 진하사은겸세폐사의 부사로 청나라에 파견 |
활동 시기/일시 | 1854년 - 이현서 병조 참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55년 - 이현서 예조 참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58년 - 이현서 사헌부 대사헌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60년 - 이현서 형조 판서·한성부 판윤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862년 - 이현서 예조 판서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862년 - 이현서 사망 |
부임|활동지 | 고양군 - 경기도 고양시 |
부임|활동지 | 울산도호부 - 울산광역시 |
부임|활동지 | 한성부 - 서울특별시 |
묘소|단소 | 이현서 묘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 장석마을 |
성격 | 문관 |
성별 | 남 |
본관 | 전의 |
대표 관직 | 예조 판서 |
[정의]
경기도 가평군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 문신.
[가계]
이현서(李玄緖)[1791~1862]의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자는 치장(穉長)이고, 호는 성수(星叟)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금산군수 이덕린(李德隣), 할아버지는 황주목사 이영배(李永培), 아버지는 대사헌 이문회(李文會)이다. 부인은 창녕 조씨(昌寧 曺氏)이다. 아들로는 이근필(李根弼)이 있다.
[활동 사항]
이현서는 1816년(순조 16)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839년(헌종 5) 춘당대시(春塘臺試)에서는 부(賦)에서 수위를 차지하여 직부회시(直赴會試)의 자격을 얻었다. 1840년(헌종 6)에 고양군수(高陽郡守), 1841년(헌종 7)에 울산부사(蔚山府使)로 나아갔으나, 지방 형편이 어려움에도 환곡미와 세금 상납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탄핵받았다.
이후 1844년(헌종 10) 증광시에 을과 7등으로 급제하였으며, 1845년(헌종 11)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이어서 시관으로 임명되었는데, 경서의 본문을 잘라내어 출제한 것이 문제가 되어 파직당하였다. 1846년(헌종 12) 사간원 대사간으로 복직하였으며, 계속해서 의주부윤(義州府尹)에 추천받았으나 임명받지는 않았다.
1851년(철종 2)에는 이조 참의, 이듬해에는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1853년(철종 4) 진하사은겸세폐사(進賀謝恩兼歲幣使)의 부사(副使)로 청나라에 파견되었고, 품계를 가자받았다. 1854년(철종 5)에는 병조 참판, 1855년(철종 6)에는 예조 참판에 올랐다. 1858년(철종 9)에는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추상존호도감(追上尊號都監)의 독옥책관(讀玉冊官)도 지냈다.
1860년(철종 11)에는 형조 판서와 한성부 판윤(判尹)을 역임하였고, 1862년(철종 13) 예조 판서에 올랐다. 이외에 강화·개성·수원·광주의 유수(留守) 및 관찰사 자리에 거듭 추천받았으나 나아가지는 않았고, 예조 판서 복무 중에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성수집(星叟集)』이 있으며, 1888년(고종 25) ‘효헌(孝憲)’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묘소]
이현서의 묘는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 장석마을에 있으며, 부인과 합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