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8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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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林芸 |
영어공식명칭 | Lim Un |
이칭/별칭 | 언성(彦成),첨모당(瞻慕堂),노동산인(蘆洞散人)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광우 |
출생 시기/일시 | 1517년 - 임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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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64년 - 임운 효행으로 정려 하사 |
활동 시기/일시 | 1567년 - 임운 사직서 참봉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69년 - 임운 집경전 참봉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70년 - 임운 후릉 참봉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70년 - 임운 경기전 참봉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72년 - 임운 연은전 참봉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572년 - 임운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586년 - 임운 용문 서원 배향 |
추모 시기/일시 | 1662년 - 용문 서원 사액 |
수학|강학지 | 임운 강학지 -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산수리 |
묘소|단소 | 임운 묘소 -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 |
사당|배향지 | 용문 서원 -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봉산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은진(恩津) |
대표 관직|경력 | 연은전 참봉 |
[정의]
조선 전기 경상도 안음현(安陰縣) 출신의 문신.
[가계]
임운(林芸)[1517~1572]의 본관은 은진(恩津), 자(字)는 언성(彦成), 호(號)는 첨모당(瞻慕堂) 또는 노동산인(蘆洞散人)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의령 현감(宜寧縣監)을 지낸 임천년(林千年)이며, 할아버지는 사용(司勇)을 지낸 임자휴(林自庥)이다. 아버지는 진사(進士) 임득번(林得蕃), 어머니는 참봉(參奉)을 지낸 강수경(姜壽卿)의 딸 의인(宜人) 진주 강씨(晉州姜氏)이다. 임운의 부인은 참봉(參奉)을 지낸 이의안(李義安)의 딸 정부인(貞夫人) 성산 이씨(星山李氏)다. 임훈(林薰)과 임영(林英)의 동생이다.
[활동 사항]
임운은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났으나, 16~17세에 이르기까지 문장의 구두(句讀)조차 떼지 못하였다. 다만 호걸스럽고 기력이 뛰어나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였다. 이에 주위에서 무과를 권유하였고, 아버지 임득번은 『오자병법(吳子兵法)』을 주어 읽게 하였다. 임운은 오자(吳子)의 글을 읽다가 문득 문리(文理)를 깨닫게 되었으며, 이후 학문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임운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임득번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형 임훈과 함께 정여창(鄭汝昌)을 마음속으로 스승으로 모시고 따랐다. 성장해서는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노진(盧禛)·박순(朴淳) 등의 명현들과 교유하였다.
임운은 1561년(명종 16) 아버지 임득번이 세상을 떠나자, 형 임훈과 함께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정성껏 상장례(喪葬禮)를 거행하였다. 이에 1563년 안음 현감(安陰縣監) 박응순(朴應順)이 임훈·임운 형제의 효행(孝行)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이우민(李友閔)에게 보고하였고, 이우민은 다시 이를 조정에 보고하여, 1564년(명종 19) 고향에 정려문(旌閭門)이 세워졌다. 1567년(명종 22) 이조(吏曹)의 천거로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에 임명되었다. 1568년(선조 1) 퇴계 이황이 대제학(大提學)이 되어 한양에 머무르게 되자, 여러 차례 퇴계의 집을 찾아가 학문에 의심나는 점을 물었다. 이후 퇴계가 고향 예안현(禮安縣)의 도산(陶山)[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으로 물러간 후에도 찾아가 뵙기를 멈추지 않았다.
임운은 1569년(선조 2) 집경전 참봉(集慶殿參奉)에 임명되었을 때에는 경주의 자옥산(紫玉山)[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 일대]을 유람하기도 했다. 1570년(선조 3) 후릉 참봉(厚陵參奉),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에 임명되었다. 1572년 연은전 참봉(延恩殿參奉)에 임명된 지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임운의 문집으로는 3권 1책의 『첨모당집(瞻慕堂集)』이 전한다. 임운은 천문·지리·의약·수학·병서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묘소]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 중산(中山)에 임운의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1561년에 형 임훈과 함께 임운에게 효행으로 정려문(旌閭門)이 내려졌다. 임운의 정려문은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에 있다. 현재 ‘거창 갈계리 은진 임씨 정려각(居昌葛溪里恩津林氏旌閭閣)’[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434호]으로 정비되어 있으며, 이후 정려된 후손 네 명의 위패가 같이 모셔져 있다.
1860년(철종 11) 임운은 가선대부 이조 참의(嘉善大夫吏曹參議)에 증직되었으며, 1586년(선조 19) 용문 서원(龍門書院)에 배향되었다. 용문 서원은 1582년(선조 15) 옛 경상도 안음현이었던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봉산리에 건립된 서원이다. 처음에는 정여창만 배향하였으나, 1586년 임훈·임운 형제가 추가 배향되었으며, 1642년(인조 20)에는 정온(鄭蘊)이 배향되었다. 용문 서원은 1662년(현종 3) 사액(賜額)이 내려졌지만,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