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촌마을은 김제시에서 국도 23호선을 따라 죽산면 소재지를 향하다 보면 좌측의 홍산[홍지뫼] 서쪽 방향에 위치하고 있다. 풍수적으로 기러기가 내려앉은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홍지뫼가 마치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다. 오랜 세월 벼농사가 근간이었던 이 마을은 인근에 위치한 벽골제가 말해 주듯 옛날부터 대규모로 벼농사가 이루어졌던 유서 깊은 곳이다. 이 지역을 배경으로 하...
-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 내촌마을에는 모내기철이면 ‘단’이라 부르는 일모임이 있어 일을 분담하여 모내기를 하였다. 논의 면적이 넓기 때문에 바쁜 모내기철에는 편을 나누어야 제철에 농사일을 마칠 수 있었다. 단은 보통 20여 명 정도의 인원으로 구성되었는데, 내촌마을에는 웃단, 큰뜸단, 너머뜸단, 그렇게 3개의 단이 있었다. 단장은 나이가 좀 들고 활동력이 있는 사람이 맡...
-
홍산리 내촌마을을 찾아가려면 먼저 김제시에서 부안 방면으로 국도 23호선을 따라 약 6㎞를 따라가다 보면 나오는 죽산면을 찾아가야 한다. 또 다른 길도 있다. 김제시 남서쪽 외곽의 후신 교차로에서 국도 29호선으로 들어서서 벽골제를 향해 2㎞ 정도 가면 월촌우체국 사거리에 ‘죽산’이란 이정표가 보인다. 이 길을 따라 다시 4㎞ 정도를 가다 보면 홍산리 삼거리가 나온다....
-
내촌에는 마을회관 건물이 두 개 있다. 1982년에 마을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쌀을 모아서 지은 예전 노인회관과 1998년에 새로 지은 마을회관이 그것이다. 예전 건물은 공간이 좁고 낡아서 새로 만들었지만, 과거의 회관도 쓸모가 없다고 허물지는 않았다. 처음 만들어진 노인회관은 동네 주민 김선균 씨 집안에서 마을을 위해 땅을 희사했고, 주민들이 형편에 맞게 조금씩 쌀을...
-
내촌마을은 여느 동네처럼 집들이 한곳에 모여 있지 않고 흩어져 자리를 잡고 있다. 그래서인지 마을 곳곳을 부르는 이름들이 있다. 듣기만 해도 정다운 ‘큰뜸’, ‘구석뜸’, ‘너머뜸’, ‘재너머’ 등이 그것들로, 오랜 옛날부터 부르던 이름 그대로이다. 김분순[1933년생] 할머니는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지명 때문에 당황스러웠던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 주었다....
-
내촌마을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잡고 살아온 함양박씨 집안에는 말뫼동이라고도 불리는 말뫼동산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 오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으로 나간 박씨 가문 선조 한 분이 전투에 나가 장렬하게 전사한 후 그의 옷자락을 말이 물고 돌아와서 죽었다고 한다. 그 후 사람들이 그 말의 충성심을 기려서 말과 유품을 함께 안장한 곳이라 하여 말 묘, 또는 말뫼동...
-
과거 한반도 어느 농촌에서건 농사를 짓는 이들의 가장 큰 숙제는 원활한 농수 공급이었다. 가뭄이 드는 해에는 밭작물의 피해도 컸지만 논농사는 물 없이는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늘을 원망스럽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홍수가 들면 개천과 하천에 연하고 있는 논들은 큰물에 애써 지은 농사를 망치기 일쑤였다. 소위 천수답은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에 의존하여 농사를 짓는 논이...
-
내촌마을에서는 동물을 거의 키우지 않는다. 그 때문에 마을에 들어서도 개짖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마을의 쾌적한 환경을 위해서 서로 가금류를 사육하지 않기로 묵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새로 이사를 온 한 주민이 진돗개를 3마리 정도 사육하고 있다. 처음에는 여러 마리를 키웠는데 주민들이 마을 사정을 설명하여 수를 줄였다고 한다. 농기계가 없었던 시절 평야...
-
바람도 없이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내촌을 찾아가는데 동네 어귀에 위치한 집 은행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분을 만날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1인용 평상에 누워 은행나무가 드리우는 그림자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잠시 시간을 내달라고 청하자 처음에는 휴식을 방해한 낮선 방문객이 달갑지 않은 듯하였지만, 잠시 후에 그동안 마음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정판규[1...
-
코스모스가 길을 따라 길게 양편으로 늘어서서 가을바람에 하늘거리는 모습은 누가 봐도 아름다운 풍경이다. 그 길에서 바라보는 하늘과 땅이 맞닿은 광활한 김제만경 평야는 우리나라의 최대 곡창지이다. 그러나 아름답고 풍성한 현재의 풍경은 그냥 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닌, 선조들의 피땀으로 얼룩진 부산물이다. 억압과 착취에 항거한 농민운동인 동학농민운동명은 이 지역 일대를 근거지로 시작되었...
-
내촌마을은 현재 약 40여 호가 살고 있지만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던 1970~1980년경에는 120여 호가 살았던 비교적 큰 마을이었다. 마을을 죽 돌아보면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품이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가까이 가 보면 비어 있는 집들이 많다. 마을 인구는 10~15년 전부터 급격하게 줄어들었는데, 가장 큰 원인은 농촌에서는 자식들을 교육시키...
-
여름 한낮, 너머뜸 어귀 강순례 할머니 댁 그늘진 담장 밑은 오가는 이들의 휴식처이자 울 밖의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겨울에도 강순례 할머니의 울안에 있는 작은 사랑채에는 군불을 때는 아궁이가 있어 추운 날 불을 지펴 놓고 몇 분이 모여 도란도란 정담을 나눈다고 한다. 처음 우리가 강순례 할머니 집을 방문할 당시, 할머니 두 분이 얇은 비닐을 깔고 담장 밑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
-
정판규[1921년생] 할아버지는 “이제 늙어 눈이 아른거려 잘 보이지 않고 기력도 없어 말을 계속하면 힘이 든다.”면서도 살아온 이야기들을 차분하게 들려주었다. 일제강점기 그는 농사일을 해도 일본 사람들이 다 뺏어 가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고 털어놓았다. 이 시기에 일본 사람들은 안하무인으로, 마을 주민들을 마치 종 부리듯이 했다고 한다. 행여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멈...
-
바쁜 농사철의 농촌에서는 마을에 들어서도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어렵다. 마을길에서 마주치는 사람이 없어 이집 저집을 방문하다 보니 마침 한 할머니가 손수레에 뭔가를 싣고 있었다. 밭에 가야 한다며 서두르는 모습에 이야기를 청하기가 어려웠다. “암만히도 오늘 아니먼 낼 비가 올 것 같아서, 비오기 전에 깨를 털어야 흥게.” 그래서 손수레를 끌고 바삐 움직이는 할머니의 뒤를 따라 홍산...
-
김제(金提)라는 지명을 풀이하면 ‘황금을 캐내는 둑’이라고 한다. 여기서 황금은 노랗게 황금색으로 일렁이는 추수기의 벼이삭을 의미한다. 만경(萬頃)이란 말 또한 1만 이랑의 드넓은 평원을 가리킨다. 따라서 예부터 부르는 ‘징게 맹갱 외얏밋[외배미] 들’은 ‘황금이 노랗게 일렁이며 끝없이 하나로 이어진 너른들’이라 풀이할 수 있다. 기름진 옥토와 따듯하고 비가 많은 기후...
-
회갑(回甲)은 우리나라 전통의 생애 의례 가운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61세는 환갑 또는 회갑으로 자기가 태어난 해로 돌아와 새로 태어남을 의미할 정도로 주위로부터 축하를 받는 특별한 기념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을 주민 대부분이 고령이다 보니 회갑연을 준비할 분들이 거의 없어 마을에서 열리는 회갑 잔치는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