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12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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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茂松庾氏三綱門 |
영어음역 | Musong Yussi Samgangmun |
영어의미역 | Memorial Gate for Musong Yu Clan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낙양리 88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주명준 |
성격 | 충신|효자|열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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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정려 비각|팔작지붕 |
건립시기/일시 | 1868년 |
정면칸수 | 3칸 |
측면칸수 | 1칸 |
소재지 주소 |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낙양리 88 |
소유자 | 무송유씨 종중 |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낙양리에 있는 개항기 무송유씨 가문의 정려각.
[개설]
무송유씨(茂松庾氏) 가문의 충신, 효자, 열녀에게 정표가 내려져, 합동으로 무송유씨 삼강문을 건립하였다. 충신인 유영룡(庾泳龍)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산을 털어 의병을 이끌고 근왕(勤王)하다가 청주에 이르러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왔다. 유영룡이 죽은 후에 조정은 통훈대부 사헌부감찰(贈通訓大夫司憲府監察)을 증직하고 1875년(고종 12) 5월에 정표하였다.
효자인 유장억(庾長億)은 부모를 섬김에 있어 성의를 다하고 역사책을 두루 참고하여 『유씨보(庾氏譜)』를 초록(抄錄)하였으며,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1870년(고종 7) 3월에 효자 유장억에게 정려를 내렸다. 이곳에 유장억 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유장억의 재종 유운억(庾運億)은 한 달 사이에 부모상을 연거푸 당하여 곡성이 끊이지 않자, 선공(先公)이 꿈에 나타나 몸을 돌볼 것을 준열히 경계하면서, 한 지점을 가리키며 여기가 내 유택(幽宅)이라 하였다. 유운억이 꿈에서 깨어 추심하니 대단한 길지인지라 안장을 했다. 효자 유운억에게 1868년(고종 5)에 정려가 내려졌다. 이곳에 유운억 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유운억의 현손 유희창(庾喜昌)의 처 함열김씨(咸悅金氏)는 나이 17세에 혼인을 하여, 남편이 집에 돌아간가서 병으로 위급하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흘려 남편을 소생하게 하였다. 그러나 남편 집에 돌아간 지 몇 개월 만에 죽자, 시부모에게 글을 올려 “살아서는 시가에 돌아가지 못했으나 죽어서는 남편과 함께 묻히기를 바랍니다.” 하고 음독 자진하였다. 조정은 정려를 내렸고 이곳에 함열김씨 행적비가 있다.
[위치]
고창에서 대산면으로 가는 국도 23호선을 달리다가 성송면에서 오른쪽으로 난 도로를 따라가면 낙양마을이 나온다. 마을 앞쪽은 야트막한 구릉지대이며 뒤쪽 역시 낮은 언덕이 있어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주고 있다. 낙양마을의 동쪽과 북쪽에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마을 사람들의 삶의 근원이 되고 있다. 무송유씨 삼강문은 낙양마을의 북쪽 끝부분에 있는 모정 옆에 있다. 주위에 왕버드나무와 느티나무가 있어 경관이 아름답다.
[변천]
무송유씨 삼강문은 1868년(고종 5)에 건립되었다. 현존 건물은 1948년에 새로 지어져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형태]
적벽돌로 만들어진 담장 안에 바닥 전체를 시멘트로 포장하고, 주초 역시 시멘트로 놓았다. 원래의 주초는 당연히 나무로 만들었을 것이지만 원형은 알 길이 없다. 돌로 두리기둥을 세우고 윗부분에는 짧게 나무 기둥을 세웠다. 나무 기둥이 창방과 평방으로 결구되어 있고, 기둥 위에 주두를 올렸다. 다포식 양식이다. 대문은 철문이었고,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팔작지붕에 겹처마이다. 1982년에 건립된 비석은 높이 162㎝, 너비 55㎝, 두께 24㎝이다. 앞에는 돌난간을 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