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7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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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沔 |
영어음역 | Gim Myeon |
이칭/별칭 | 지해(志海),송암(松菴)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용만 |
[정의]
조선 전기 고령 출신의 유학자이자 의병장.
[가계]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지해(志海), 호는 송암(松菴). 아버지는 경원부사를 지낸 김세문(金世文)이다.
[활동사항]
김면(金沔)[1541~1593]은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산야에 은거하며 조용히 소일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지금의 고령군 개진면 양전리에서 일가 및 가동(家僮) 등 700여 명과 분연히 궐기하였다. 이때 조종도(趙宗道)·곽준(郭䞭)·문위(文偉) 등과 경상남도 거창과 고령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불과 수일 만에 2,000명의 대부대가 되었고 군량 조달에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지금의 김천 지역인 김산·개령에 있던 10만 적병과 대치하여 우지에 진을 치고 군율로 호령하여 군기가 정연하였으며,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과 더불어 지례(知禮)[현 김천시 지역]를 역습한 끝에 대승하여 합천군수에 임명되고 의병대장의 호를 받아 1도의 군을 통솔하였다.
1593년(선조 26) 1월 우도병마절도사(右道兵馬節度使)[당시 경상도를 우도와 좌도로 나누었음]가 되어 양호의 군병을 동원하여 개령에 진을 치고 선산의 적을 격멸하려는 작전 계획을 세웠다. 대오가 이미 정돈되었을 때 갑자기 병을 얻어 큰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사상]
어려서부터 학업에 뜻을 두었으며, 한강 정구 등과 막역한 친구이었고,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경의학(敬義學)을 닦아 후진을 가르치는 데 힘썼다.
천성이 절의가 있고, 충심이 돈독하여 의병을 모집할 때 가족이 10리 밖에 있었으나 한 번도 가보지 않고 가족들에 대한 걱정도 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 곽재우(郭再祐)와 경상감사 김수(金睟)가 서로 격문을 띄워 상대방의 죄를 주장하였으나, 김면이 두 사람을 설득하여 갈등을 해소하고 화해하도록 하였다.
[묘소]
묘소는 고령군 쌍림면 칠등(七嶝)에 있다.
[상훈과 추모]
병조판서를 추증하고, 1607년(선조 40)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일등의 공으로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를 가증(加贈)[이미 증직이 주어진 사람에게 또다시 증직이 더해짐]하였다. 1609년(광해군 즉위년)에는 예조좌랑 한계남을 보내 제문을 하사(下賜)하였다. 윤선거(尹宣擧)가 행장(行狀)을 짓고, 채제공(蔡濟恭)이 신도비문을 지었다. 대가야읍 연조리 도암서원(道巖書院)에 향사(享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