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8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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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宗直 |
영어음역 | Gim Jongjik |
이칭/별칭 | 계온(季昷),효관(孝盥),점필재(佔畢齋),문충(文忠)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용만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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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한골[추원재] |
성별 | 남 |
생년 | 1431년 |
몰년 | 1492년 |
본관 | 선산 |
대표관직 | 지중추부사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계온(季昷)·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아버지는 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낸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이고,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사재감정(司宰監正) 박홍신(朴弘信)의 딸이다. 김숙자는 경상도 고령과 개령, 성주 등지에서 수령과 교수직을 역임하였으며, 밀양에 거주하던 박홍신의 사위가 되면서 처가를 따라 밀양으로 이주하였다. 김종직(金宗直)이 외가인 밀양에서 태어나고, 그 종가가 고령에 있게 된 연유도 김숙자의 혼인과 벼슬 경력에서 비롯된다.
가문은 경상북도 선산의 토성이족(土姓吏族)에서 사족(士族)으로 성장하였으며, 아버지 대에 이르러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중앙 관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김종직은 1451년(문종 1) 혼인한 울진현령 조계문(曺繼文)의 딸이자 자신의 문인 매계(梅溪) 조위(曺偉)의 누나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부인이 죽자 1485년(성종 16) 사복첨정 문극정(文克貞)의 딸인 남평문씨와 재혼하였다. 형으로 김종석(金宗碩)이 있다. 그의 후손들은 6세손인 김수휘 대에 지금의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 가곡마을에 이주한 뒤 종가를 지키며 세거하고 있다.
[활동사항]
김종직[1431~1492]은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가학을 계승하였으며, 1446년(세종 28) 과거에 응시하여 「백룡부(白龍賦)」를 지어 김수온(金守溫)의 주목을 받았으나 낙방하였다. 그 뒤 형 김종석 등과 함께 황악산 능여사(能如寺)에서 독서에 힘써 학문을 크게 성취하였다. 1453년(단종 1) 태학에 들어가 『주역(周易)』을 읽으며 주자학의 원류를 탐구하여 동료들의 경복(敬服)을 받았으며 이해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459년(세조 5)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어서 저작·박사·승문원교검·사헌부감찰 등을 두루 지내면서 왕명에 따라 세자빈한씨애책문(世子嬪韓氏哀冊文)·인수왕후봉숭왕책문(仁壽王后封崇王冊文) 등을 지었다. 1464년(세조 10) 왕이 천문·지리·음양·율려·의약·복서 등 잡학에 뜻을 두고 있는 것을 비판하다가 파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경상도 병마평사에 기용되면서 본격적인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다. 1467년(세조 13) 홍문관수찬, 1468년 이조좌랑, 1469년(예종 1) 전교서교리가 되었다.
1470년(성종 1) 예문관수찬 지제교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 기사관에 임명되었다. 이어 노모를 모시기 위해 외직으로 나가 함양군수가 되었다. 1471년 봉열대부·봉정대부, 1473년 중훈대부에 올랐으며, 1475년에는 중직대부를 거쳐 통훈대부에 올랐다. 1476년 선산부사로 자청해 나갔다. 함양군수와 선산부사를 역임하는 동안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관혼상제를 시행하도록 하고 봄가을로 향음주례(鄕飮酒禮)와 양로례(養老禮)를 시행하는 등 성리학적 향촌 질서를 수립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때 영남 사림파를 형성한 김굉필·정여창·이승언·홍유손·김일손 등 여러 제자도 길렀다. 1482년(성종 13) 왕의 특명으로 홍문관응교 지제교 겸 경연시강관과 춘추관 편수관에 임명되었으며, 직제학을 거쳐 승정원도승지에 올랐다. 이어서 이조참판, 경기도관찰사 겸 개성유수, 전라도관찰사 겸 전주부윤을 지냈다. 이 무렵 제자들이 본격적으로 관계에 진출하면서 영남 사림파를 형성하여 훈구파와 대립하였다. 제자들과 함께 유향소 복립 운동을 전개하여 향촌 사회에서 재지 사림의 주도로 성리학적 질서를 확립하려고 하였다. 1489년(성종 20) 공조참판과 형조판서에 이어 지중추부사에 올랐으나 병으로 물러나기를 청하여 고향 밀양에 돌아가 후학을 가르쳤다.
[학문과 사상]
김종직은 세조의 등극을 비판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후일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었다. 무오사화로 훈구파에 의해 사림파 인물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 그의 학문은 김굉필과 조광조로 이어져 기호 사림의 형성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김종직은 무오사화 때 부관참시의 형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많은 글이 불살라져 전체적인 학문과 사상을 살펴보는 데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야은(冶隱) 길재(吉再), 아버지의 도학 사상을 이어받아 절의와 명분을 중시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히려고 하였다. 또한 『소학(小學)』과 사서(四書) 및 『주자가례』를 기반으로 하는 성리학의 실천 윤리를 강조하였으며, 오륜(五倫)이 각각 질서를 얻고 사농공상의 사민(四民)이 자기의 직분에 안정하도록 하는 인정(仁政)이 이상적인 정치라고 보았다. 이를 위해 향교 교육과 인재 등용을 매우 중요시 하였다.
한편으로는 경술을 근본으로 하면서도 당시 대명(對明) 사대외교(事大外交)에 꼭 필요한 사장(詞章)의 학문을 겸비하기도 하였다. 사실 그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정평이 있었다. 문학 사상은 명분(名分)·절의(節義)·수기(修己)에 근간을 두는 여말선초의 처사 문학과 송시(宋詩)의 영향을 받아 화려한 문체를 배격하고 간결하면서도 함축된 이(理)를 드러내는 것이었으나 경(經)과 문(文)을 다 같이 중시하였다.
학문은 정통 성리학의 입장을 견지한 김굉필·정여창, 시문으로 이름을 날린 김일손·유호인·조위, 사회 체제와 구속을 벗어나려는 방외인 문학의 입장에 선 남효온·홍유손 등 여러 갈래로 이어졌다. 이러한 영남 사림파의 학문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한때 침체하였다가 김굉필에게서 배운 조광조·김안국 등에 이르러 크게 융성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점필재집(佔畢齋集)』, 『유두유록(遊頭流錄)』, 『청구풍아(靑丘風雅)』, 『당후일기(堂後日記)』가 있다. 편서에 『동문수(東文粹)』, 『일선지(一善誌)』, 『이준록(彛尊錄)』 등이 있으며, 총재관(摠裁官)으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추원재 뒷산에 있다. 500여 년의 세월에 봉분이 원래 자리에서 아래로 밀려 내려온 것을 묘역 정비 과정에서 본래 자리를 확인하여 2009년 5월 중창을 마치고 중창 기적비를 건립하였다.
[상훈과 추모]
경상남도 밀양시 예림서원과 함양 백연서원, 경상북도 선산군 금오서원과 김천시 경렴서원·덕림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