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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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在烈 |
영어음역 | Gim Jaeyeol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운수면 화암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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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고령군 운수면 화암리 |
성별 | 남 |
생년 | 1884년 |
몰년 | 1948년 |
본관 | 김녕 |
대표경력 | 광복회 회원 |
[정의]
일제강점기 고령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재열(金在烈)[1884~1948]은 본관이 김녕(金寧)으로, 지금의 고령군 운수면 화암리에서 태어났다.
[활동사항]
김재열은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의 문하에서 수학한 후 상경하여 경신중학교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 달성친목회(達城親睦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15년 정월 15일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에 들어가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를 지원하기 위해 정보 연락 및 군자금 모집과 독립군에 충원하려는 청·장년의 모집에 힘썼다.
1915년 7월 15일 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仲)·우재룡(禹在龍) 등과 함께 대구 달성공원에서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고 만주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 지원과 독립군 양성, 그리고 무력 투쟁을 통해 독립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조선국권회복단과 광복회는 밀접한 관계 속에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하였다.
1915년 4월 이미 박상진은 최준명(崔俊明)으로 하여금 서창규(徐昌圭)를 만나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요청하도록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다시 6월 김재열을 비롯하여 최병규(崔丙圭)·정운일(鄭雲馹) 등이 권총을 소지하고, 서창규를 만나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돈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바 있었다.
김재열은 1916년 9월 3일 군자금 마련을 위해 이시영·정순영·홍주일·정운일, 그리고 대구의 최병규·최준명·김진만·김진우 등과 서우순(徐祐淳)의 금고를 털려다가 실패하고 체포되었다. 1917년 6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른바 대구 권총 사건이었다. 그 후 1917년 11월 10일 장승원 암살 사건과 1918년 1월 24일 박용하 암살 사건으로 광복회의 전모가 드러남에 따라 천안경찰서에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4개월 만에 풀려났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