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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청년동맹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1574
한자 高靈靑年同盟
영어의미역 Goryeong Youth Leagu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회운동단체
설립연도/일시 1927년 10월 29일연표보기
해체연도/일시 1936년 이후연표보기
설립자 고령청년연맹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고령 지역에서 결성된 청년 단체.

[개설]

1927년 조선청년연맹(朝鮮靑年聯盟)이 “앞으로의 조선청년운동은 민족적 협동 전선의 선두대가 되어야 한다”고 제창함에 따라 각 지방의 청년 단체는 그 성격을 초월하여 단일 청년 동맹을 결성한다는 것을 새로운 청년 운동의 방침으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927년 7월에 대구 지역의 청년 운동 단체들이 청년 운동의 방향을 전환하여 대구청년동맹을 결성하였고, 같은 해 10월 29일 고령에서도 고령청년연맹을 해체하고 고령청년동맹을 조직하였다.

[설립목적]

고령청년동맹은 조선청년총연맹의 방침에 따라 종래 청년 운동의 분산·배타적인 경향을 청산하여 전 민족의 각계각층을 통일한 대중적 청년 운동을 전개한다는 방침 하에 고령청년연맹을 해체하고 각 면 지역 청년회를 통합하는 군단위의 청년 동맹으로 거듭나기 위해 조직하였다.

[변천]

고령청년동맹은 1927년 10월 29일 조직되었다. 이날 고령청년연맹은 고령청년회관에서 임시대회를 개최하고 고령청년연맹의 해체와 군 단위 청년 동맹을 조직하기로 하고 강령과 규약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집행 위원으로 집행위원장 신철휴(申喆休)·서무부 유영식(兪永植)·조직부 배차돌(裵且乭)·교양부 정춘택(鄭春澤)·체육부 유구목(兪龜穆)·소년부 김형돈(金亨敦) 등을 선정하였다.

1928년 8월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여 집행위원장 유구목(兪龜穆)·서기 이용구(李龍九)·조직부 정운○(鄭雲○)·조사부 배수동(裵壽東)·교양부 남기원(南基元)·소년부 이장경(李長庚) 등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1929년 5월 집행위원회를 개최하여 집행위원장 송○○(宋○○)와 체육부 남기원 등을 임원으로 선출했으며 조선청년총동맹-경북연맹-고령청년동맹-지부라는 계통의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1931년 5월 조선청년총동맹이 해소되면서 지방 조직도 사실상 활동이 중단되고 말았지만 고령청년동맹은 1936년 이후까지도 간간이 활동을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

[주요사업과 업무]

분기별 강연회 개최, 강습소 설치, 노동 야학 운영, 유치원 설치 등 주민의 생활 개선과 교육에 주된 관심을 기울였다.

[활동사항]

고령청년동맹은 창립 이후 조선청년총동맹의 활동 방향에 따라 중앙집행위원제를 채택하여 조직을 운영하고 활동했으며 각 면부에서는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강습소와 야학을 설립하였다. 1932년 1월 고령청년동맹 회원 배수동·배호영·배병희는 고령군 덕곡면에서 반성동학관(盤城洞學館)·용흥동학관(龍興同學館)·옥동학관(玉洞學館) 등의 야학을 설립하여 남녀 학생 50~60명에게 무료로 봉사하였다. 그러나 1932년 1월 31일 이후 모두 폐쇄당하고 말았다.

1936년 어느 날 경상북도 도청의 고위 간부가 대구부 내의 거물급 일본인과 관용차에 동승하여 합천 해인사 단풍놀이를 다녀오다가 고령에 들러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관용차 앞뒤에 요란하게 꽂힌 단풍가지를 주위에 놀던 소년들이 가지고 달아났다. 이에 격분한 이들은 경찰을 불러 소년들을 체포하도록 했다.

이에 주변 상점에서 이를 주시하고 있던 고령청년동맹신철휴·김건정(金健精)·이원룡(李元龍) 등이 “우리 강산에 뿌리박고 있는 생나무를 훔쳐 차에 싣고 온 것은 도적질이 아니고, 산에서 도적질해 온 나무 가지를 가져간 소년들만 도적으로 모는가?”라고 질책하며 민족적 울분을 토하기도 하였다. 그 외 고령청년동맹은 1936년 각 부문 운동 단체들을 통합하여 고령체육협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고령청년동맹은 고령 지역의 청년 운동 및 사회운동을 지도함으로써 고령 지역 민족 해방 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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