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A030102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읍 연조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경용

[연조리 봉두골은 조상들의 터전]

유병규(兪炳圭)[1941년] 씨는 고령 토박이로 어린 시절 공부하느라 고향을 잠깐 동안 떠나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줄곧 고령에서 살았다. 그래서 고령의 역사와 문화에 해박할 뿐만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대가야 문화를 지키고 계승하는 중추적 역할을 해 왔다. 또 지역 유지로서 정치, 사회, 경제 분야에서 대가야 도읍지 고령을 더 큰 외부 세계와 소통시키는 역할도 해 왔다. 현재 그가 맡고 있는 고령군지역혁신협의회장과 가야문화권지역발전혁신광역협의회장, 고령새마을금고 이사장, (사)대가야체험축제추진위원회 위원장 등의 직함들이 이를 말해 준다.

유병규 씨는 1942년 1월 6일[양력] 지금의 대가야읍 쾌빈리에서 6남매 중 셋째로 출생했다. 그가 지금 거주하는 연조2리의 옛 지명은 봉두골(鳳頭골)로서 그의 26대조[유탄]가 조선 개국조인 이성계를 피해 700년 전에 터를 잡은 곳이기도 하다.

지명이 말해 주듯 이곳은 대가야의 기운이 가장 성성한 곳이다. 유병규 씨는 왕정(王井)이 있는 고령초등학교와 동아아파트 자리를 옛 대가야의 왕궁이 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만큼 이곳은 예부터 고령의 상층에 속하는 달성서씨, 기계유씨, 거창신씨, 밀양박씨 등의 친족 집단들이 세거했다. 기계유씨 가문은 연조리 외에도 내곡3리[일명 수곡]와 일량마을 등에서도 집성촌을 이루었다. 유병규 씨가 속한 기계유씨 가문은 달성서씨와 밀양박씨를 비롯해 여주이씨 등과 혼반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밀양박씨 가문과는 고령 보부상[상무사] 반수를 번갈아 가며 맡을 정도로 상업계에서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흙 클럽’을 조직하여 향토 사랑을 실천하다]

유병규 씨는 고령초등학교를 마친 후 대구로 유학하여 계성학교를 마쳤다. 당시 고령에서 대구까지는 낙동강을 나룻배로 건너 오가는 데 3시간이나 걸렸다. 대구농업고등학교에 들어갔지만 공부가 너무 힘이 들어 2년까지만 다녔다. 이후 합천 삼가면 외토초등학교 준교사로 취직해 3학년과 4학년을 지도하기도 했지만 사정상 곧바로 그만두었다. 참다운 교육자가 꿈이기도 했지만 이로써 그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유병규 씨는 귀향 후 심훈의 『상록수』에 감명 받아 지역 출신 탤런트 신충식 등과 함께 ‘흙 클럽’을 조직하여 향토 사랑을 실천했다. 그 일환으로 20대이던 1960년대에 촉진회[재건국민운동] 사무국장을 맡아 청소년 지도와 마을금고 사업, 향토 개발 사업 등을 추진했다. 초대 고령군수를 역임한 이진한 씨와는 한동안 중학 과정의 야학을 열기도 했는데, 이곳은 후에 농업기술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새마을금고 사업은 당시 농가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면면촌촌’에 개설한 금융 쇄신 운동으로서, 당시 관내 곳곳을 다니며 부기(簿記) 등을 교육시켰다.

[대가야의 흔적을 갈고닦다]

50세를 전후해 유병규 씨는 고령문화원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사무국장직을 겸직했다. 동시에 고령체육회 고문직과 고령새마을지도자협의회 초대 회장까지 맡아 지역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이후에는 4년간 고령문화원 원장으로 재직하며 고령의 문화와 대가야 역사를 발굴하고 알리는 데 매진했다. 또한 사라져 가는 마을 문화를 기록해 놓으려는 생각에서 『고령지방 마을사』와 『고령 사투리』 등을 간행했다. 『대가야국의 성장과 문화』 및 의병장 김면(金沔)을 그린 『송암 선생 일대기』를 집필하고, 죽유(竹牖) 오운(吳澐) 선생의 『동사찬요(東史纂要)』를 공동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유병규 씨는 아직까지 미궁의 사안인 대가야 왕궁 터를 규명하는 데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다. 아직 확실한 사료가 부족하지만, 그는 고령초등학교 운동장에 있는 왕정 유적에 주목하여 일대를 왕궁 터로 추정하고 있다. 6·25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되어 흔적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실제로 고령초등학교를 개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주춧돌이 발굴되기도 했다. 유병규 씨는 또 가야금의 명인 악성(樂聖) 우륵의 출생지가 성열현(省烈縣)임을 사료를 근거로 고증하기도 했다.

2009년에는 고령군과 경북대학교에서 공동으로 펴낸 『일본열도 속의 대가야 문화』를 확인하기 위해 일본의 여러 곳을 다녀오기도 했다.

유병규 씨는 본업인 고령새마을금고 이사장으로서 하루하루 처리해야 할 일이 많지만, 2007년부터 3년 동안 계속 고령대가야체험축제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대가야 문화를 장소 마케팅 차원에서 널리 알리는 데 매진하고 있다. 특히 더 나은 고령대가야체험축제를 만들기 위한 묘안을 짜내는 데 골몰하고 있다. 틈틈이 쌍림면에 조성한 2000여 평[6611.57㎡]의 농장 관리에도 소홀하지 않는다. 유병규 씨의 대가야 문화 사랑 정신은 문화 생성의 근본인 땅 사랑과도 깊은 연관이 있을 것 같다.

[정보제공]

  • •  유병규(남, 1941년, 고령읍 연조리 주민, 사단법인 대가야체험축제추진위원회 위원장 겸 고령새마을금고 이사장)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