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4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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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倭寇侵入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김종수 |
[정의]
13세기~16세기에 군산 지역 해안에서 약탈을 하던 일본인 해적의 침입
[개설]
군산 지역은 14세기에 들어와 왜구(倭寇)의 극심한 침략에 시달리게 된다.
[역사적 배경]
14세기 중엽 이후 왜구(倭寇)가 크게 세력을 키워 한반도는 물론 중국 연해안까지 침략하게 된 것은 동아시아 정세 변화와 이와 관련된 일본 국내의 정세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14세기 중엽에 들어 원(元)이 쇠퇴하게 되자, 원의 일본 침입 이후 전제화되어 있던 일본은 남북조의 내란기에 접어들게 되는데, 남조(南朝) 세력권에 있던 일부 지방 세력들이 해적화하여 한반도와 중국 연해안을 침략하였다. 일본 사회 내부의 모순이 국내에서 통제되지 못하고 국외로 공격성을 띠게 된 것이다.
[경과]
왜구 소탕전을 보면 1376년(우왕 2) 최영(崔瑩)이 홍산(鴻山)[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에서 대승을 거둔 홍산 대첩, 1380년(우왕 6) 왜선 5백 여 척이 진포(鎭浦)에 침입했을 때 나세(羅世)·최무선(崔茂宣) 등이 화포로 모두 불살랐던 진포 싸움, 이 때 상륙한 왜구가 내륙 각지를 노략하고 황산(荒山)에 이르렀을 때 이성계(李成桂) 등이 이를 물리친 황산 대첩, 1383년(우왕 9) 정지(鄭地)의 남해 대첩(南海大捷)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왜구를 격퇴하는 데 공이 컸던 인물은 최무선이었다. 그는 화약·화포·화전(火箭) 등의 화기를 만들어 진포 싸움과 남해 대첩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결과]
14세기에 들어와 군산도를 포함한 군산 지역은 왜구의 침입에 시달리게 된다. 왜구의 침입은 그 이전부터 있었으나 14세기에 들어와 침입의 빈도와 그 규모가 커졌다. 1323년(충숙왕 10) 6월 왜구는 군산도에 침입하여 개경으로 가는 조운선을 습격하여 조세미를 약탈해갔다. 특히 1380년(우왕 60) 8월 왜구들은 500척에 이르는 대선단을 거느리고 임피의 진성창(鎭城倉)을 노략질하기 위해 진포로 침입해 왔는데, 왜구의 수는 무려 10,000명 이상에 이를 것으로 추어되고 있다. 이러한 왜구의 함대를 도원수 심덕부, 상원수 나세, 부원수 최무선이 이끄는 고려 함대가 함포 사격을 통해 궤멸시키니, 이것이 진포 대첩이다.
진포 대첩 이후에도 군산 주변에서 왜구의 노략질은 그치지 않았고, 1382년(우왕 8)에 해도 원수 정지 장군이 50척의 배로 진포에 침입해오자 군산도까지 추격선을 보내 4척의 배를 나포하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도 1406년(태종 6)에는 남번(南番)의 조와국[자바] 사신 진언상(陳彦祥)이 전라도 군산도에 이르러 왜구에 약탈당하기도 하는 등 왜구의 침입은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기 까지 끊임없이 군산 지역에서 나타났다.
[의의와 평가]
왜구는 여러 방면에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연해안 지역은 빈번한 왜구로 피해를 많이 입어서 ‘연해안 수십 리의 지역에는 인가가 전혀 없다.’고 표현할 정도로 황폐화되었으며, 정치적으로 개경의 계엄령에 따른 민심의 동요, 천도론(遷都論)의 대두로 인한 조정 상하의 불안감, 민가의 약탈 등은 정치적 불안을 가중시켰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피해는 경제적인 것이었다. 국고 수입의 원천인 조세를 운반하고 보관하던 조운선과 조창의 약탈은 국가 재정을 파탄의 지경에까지 몰고 갔다. 이에 조세를 내륙으로 운반하려는 육지 운송을 시도해 보았으나 실패했고, 국가의 재정 수입은 날로 줄어들어 녹봉을 지급하지 못하거나 군량미의 부족까지 초래하는 등 경제적 위기에 봉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