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15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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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鄕校 |
이칭/별칭 | 교궁(校宮),재궁(齋宮)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유재리 |
[정의]
조선 시대 유학 교육과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 설치했던 중등 관학(官學) 교육 기관.
[개설]
향교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지방에 설립된 관학 교육 기관으로, 각 지방에서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기능과 공자 및 여러 성현에 대한 제향 기능을 담당했다.
향교의 영역은 크게 강학(講學) 공간과 제향(祭享) 공간으로 나뉜다. 강학 공간은 명륜당(明倫堂)과 기숙 공간인 동재(東齋)·서재(西齋)로 구성된다. 제향 공간은 대성전(大成殿)과 동무(東廡)·서무(西廡)가 있는 문묘(文廟)를 일컫는다. 문묘에는 공자 이래 춘추 전국 시대의 성현(聖賢)과 유학을 성리 철학으로 진전시킨 송나라 주돈이(周敦頤)·정이(程頤)·정호(程顥)·주자(朱子), 그 외에 우리나라의 현인(賢人)을 배향하였다.
향교의 교수관은 교수(敎授)와 훈도(訓導)가 주(州)와 부(府)의 경우 문과 출신자가 파견되었고, 군과 현 등은 각도 관찰사가 별도로 학장을 선출하여 교육을 담당시켰다. 향교에서 교육받은 생도들은 소과에 응시 합격하면 성균관 입학 자격을 갖는다.
[변천]
우리나라 교육 기관은 삼국 시대부터 설립되었지만, 지방에 교육 관련 관리를 파견하여 지방 자제를 교육시키기 시작한 것은 고려 시대부터였다. 고려 성종 대 12목에 처음으로 경학 박사(經學博士)를 파견, 향교 설치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향교(鄕校)’라는 명칭은 1142년(인종 20)에 처음 사용되었다. 향교는 무인 집권기 이후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다가 고려 말 공민왕 대부터 재건되기 시작했고, 조선 건국 후 1읍(邑) 1교(校)의 원칙하에 전국 각지에 설립되었다.
조선 중기 이후 서원의 등장으로 향교는 점차 교육적 기능을 상실하였다. 교관은 중앙이 아닌 각 지방에서 충당하였고, 유생들이 서원을 선호하면서 향교의 강학 기능은 점차 약화되고 제향 기능 중심으로 명맥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1894년 과거 제도 폐지 이후로 향교는 교육적 기능을 상실하고 제향을 위한 종교적 기능만 남게 되었다. 향교 건축의 대부분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소실되어 현존하는 향교는 주로 조선 후기에 건립되었다.
[군산의 향교]
전라북도 군산시에는 조선 초기 1403년(태종 3) 전국에 360여개의 향교가 창설될 때 세워진 임피 향교(臨陂鄕校)와 옥구 향교(沃溝鄕校) 두 곳이 현존해 있다. 임피 향교는 현재 지방 문화재 자료 제95호로 지정되었으며 옥구 향교는 지방 문화재 자료 제96호로 지정되어 있다.
임피 향교와 옥구 향교 모두 조선 초기에 세워져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건과 이건 등을 거쳤지만 전형적인 초기 향교처럼 강학 공간과 제향 공간을 앞뒤로 배치한 전학 후묘(前學後廟)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임피 향교는 처음에 흑산리에 창건되었다가 1630년(인조 8) 미원리 서모곡으로 이전하였으며, 다시 1710년(숙종 36) 현재의 위치인 임피면 읍내리로 이전, 건립되었다. 홍살문과 ‘개하마(皆下馬)’라 쓰인 하마비를 거쳐, 외삼문-명륜당-내삼문-대성전에 이르는 전형적인 향교 건축 구조로 배치되어 있다. 임피 향교는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95호로 지정된 대성전이 주목된다. 전학 후묘의 배치를 잘 살려 경사진 지면에 건립하고 제향 공간인 대성전의 위엄을 돋보이도록 가파른 돌계단을 쌓아올려 내삼문을 세웠다. 내삼문을 지나면 대성전이 나오는데, 대성전은 전면 3칸 건물로 주심포 양식에 제향 공간에 어울리는 맞배 지붕을 하고 있다. 측면은 출목을 가리는 풍판을 달고 주칠하여 한층 엄숙미를 더하였다. 대성전은 전면과 후면 처마가 다른 게 특징이다. 이는 조선 후기에 전면 중시 경향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전면은 겹처마에 하엽 주두(荷葉柱頭)를 한 서까래로 이루어졌고, 후면은 홑처마로 서까래 길이가 짧고 무늬 장식도 없이 단순하게 처리하였다. 후면의 초석 중 하나가 석탑의 하대석을 이용한 것도 특징적인데, 처마의 연잎 무늬 장식과 더불어 불교적 색채를 띤다. 초석만 보면 단순히 인근 사찰의 부재를 가져다 사용한 것 같지만 처마의 하엽 주두가 전라북도 일대 사찰에서 종종 나타나는 것으로 볼 때 불교적 특징이 접목된 것으로 추정된다. 임피 향교의 대성전은 전형적인 향교 건축에, 개보수 과정에서 조선 후기 건축 경향과 지역 사찰에서 나타나는 양식까지 두루 내포하고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옥구 향교는 옥구현 이곡리에 처음 세워졌다. 1484년(성종 15)에 지금의 광월루로 옮겼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며, 1646년(인조 24)에 현재 위치인 옥구현 상평리로 이건하였다.
옥구 향교는 외삼문-강당-내삼문-대성전이 비탈진 산기슭에 기대어 일직선으로 늘어서 있다. 전형적인 형태인 전학 후묘의 배치 구조이지만, 특이한 점은 강당인 명륜당이 바깥이 아닌 안쪽을 향하고 있다. 대성전은 전형적인 향교와 마찬가지로 높은 기단위에 들어선 외삼문을 지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해 있으며, 조선 시대에 흔히 보이는 공포 양식인 이익공 양식을 취하고 있다. 대성전 측면 위쪽으로는 단군성묘(檀君聖廟)가 마련되어 있는데 그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옥구 향교는 바로 옆에 최치원의 영정을 모신 문창 서원과 세종 대왕 숭모비 및 비각이 있는 게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