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21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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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一運動 |
영어공식명칭 | the Samil Independence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미엽 |
[정의]
경기도 구리시를 포함한 조선 전체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1919년 3월에 행한 항일 독립 만세 운동.
[개설]
경기도 구리 지역의 3·1운동으로는 1919년 3월 13일 구리면 평내리 구장 이승익 주도의 만세 시위, 3월 14일 구리면 평내리 주민 150여 명의 행진, 3월 28일 구리면 아천리 이강덕과 심정봉 주도의 만세 시위가 있었다. 1919년 3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만세 시위로 구리 지역을 포함한 양주군 내에서 체포된 사람은 117명이었다.
[내용]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반대한 이전의 모든 항일 운동이 이어져 거족적으로 전개된 민족 운동이다. 3·1운동은 민족주의 대표·종교 대표·학생 등이 앞장섰던 초기 만세 운동을 계기로 농민을 비롯한 각계각층이 참여하고, 대도시에서 산간벽지까지 조선 전역에서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경기도 구리 지역의 경우도 예외일 수 없었다.
1919년 3월 13일 당시 구리면 평내리 구장 이승익(李昇翼)은 일본 총독 하세가와[長谷川]가 만세 운동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말단 기관장들에게 배부한 이른바 고유문(告諭文)을 읽어 준다는 구실로 주민들을 소집하여 만세 시위를 벌였다. 다음 날인 3월 14일 다시 모인 평내리 주민 150여 명은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며 금곡리에 있는 면사무소를 향해 행진하였다. 그러나 일본 헌병들이 이승익을 비롯하여 시위를 주도한 우보현(禹輔玄)·이석준(李石俊)·김영하(金永夏)·정기섭(鄭基燮)·이보영(李輔永) 등을 체포함으로써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3월 28일에는 아천리에 거주하던 면서기 이강덕(李康德)[당시 28세]이 심점봉(沈點奉)[당시 27세] 등과 함께 아천리 주민 수십명을 동원하여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 행렬은 토평리와 교문리까지 진출하였고, 시위 군중은 태극기를 선두에 세우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3월 29일에는 아차산 정상에 올라 태극기를 산 위에 꽂고 독립 만세를 불렀다. 그러던 중 진압에 나선 일본 경찰에게 이강덕과 심점봉이 검거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였으며, 결국 재판에서 각각 1년 6개월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1919년 3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만세 시위로 구리 지역을 포함한 양주군 내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된 사람은 117명이었다. 당시 경기도 전체의 피검자 수는 총 3,349명이었으며, 안성군[429명]·고양군[267명]·개성군[189명]·수원군[182명]에 이어 도내에서 다섯 번째로 많은 숫자였다. 수치상으로 보더라도 구리 지역에서 만세 시위가 상당히 치열하게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중앙의 민족 대표와 연계성이 없었고 더구나 지역 내에 특별한 비밀 결사 조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 주민의 상당수가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는 점이 구리 지역 3·1운동의 특징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