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0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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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福東 |
영어공식명칭 | Song Bokdong |
이칭/별칭 | 승려 구봉(龜峯)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숙희 |
출생 시기/일시 | 1910년 12월 3일 - 송복동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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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85년 2월 25일 - 송복동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3호 인정 |
몰년 시기/일시 | 1998년 3월 26일 - 송복동 사망 |
출생지 | 전라북도 순창군 |
활동지 |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읍 운수리[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
[정의]
광주광역시에서 탱화를 그린 호남불화의 기능 보유자.
[개설]
송복동(宋福東)[1910~1998]은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3호 탱화장의 기능 보유자였다. 현재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21호 탱화장인 송광무의 아버지이다. 송복동의 집안은 송복동-송광무-송영학으로 3대째 탱화를 그리며 불교미술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활동 사항]
구봉(龜峯) 송복동은 전라북도 순창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침을 잘못 맞아 말을 하지도 듣지도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9세 때 부모님을 여의고 전라북도 순창 구암사로 들어가 조선 말기 탱화의 거장이라 할 수 있는 봉영(琫榮) 박석초(朴石焦) 밑에서 10살 때부터 탱화를 배웠다. 승려 석초는 김보응, 문고산, 이만종의 대를 이은 조선 제일의 정통 금어(金魚)라 할 수 있다. 승려 구봉은 35세 때까지 승려 석초에게 조각, 개금, 탱화, 단청 등을 배워 한국 제일의 '정통 금어'가 되었다. 이후 남해 대둔사에서부터 경상북도 관음사에 이르기까지 전국을 돌며 불사를 했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결혼하여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읍 운수리[현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 살다가 1998년에 사망하였다. 승려 구봉이 남긴 작품은 탱화, 단청, 불상 등을 합쳐 천여 점을 웃돌 정도로 전국에 산재해 있다. 이 가운데 화재로 소실된 경상북도 묘관음사 목조 불상과 고창 선운사 사천왕상이 대표작으로 알려졌다.
승려 구봉은 국가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丹靑匠)인 금용(金蓉) 김일섭(金日燮)[1901~1975]의 문하생으로 비문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승려 일섭은 전라남도 화순 출신으로 금호(錦湖), 보응(普應)으로 이어지는 마곡사 계통 호서불화의 맥과 선암사 쾌윤(快允), 송광사 의겸(義謙) 등으로 이어지는 호남불화의 거두이다. 승려 구봉은 승려 일섭의 제자로 호남불화의 맥을 이었다.
승려 구봉은 월정사와 고창 선운사 사천왕상을 조각하였고, 김제 용봉사 은행목조등신대좌불, 해남 대흥사와 경상북도 묘관음사 목조 불상을 조각하였다. 또한 해인사 길상암 독성, 산신 탱화와 광주광역시 관음사 후불 탱화, 부안 내소사의 후불 탱화 등 그가 조성한 탱화는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다. 승료 구봉 불화의 장점은 표정이 풍부하고 생동감이 있어 누구나 친근감을 갖는 것이 특징이다. 당대 최고 금어였던 승려 일섭은 "기술이 나보다 낫다."고 평할 만큼 세필의 탁월한 재능을 높이 칭송하였다.
1977년에 그려진 나주 심향사의 여러 종류 탱화 화기에는 금어(金魚) 구봉(龜峯)이라 쓰여져 있다. 금어는 불화까지 그리는 단청장을 지칭하는 용어로 나주 심향사의 탱화와 단청, 조각 등을 구봉이 직접 했음을 알 수 있다. 승려 구봉은 탱화계에 최고의 금어로 알려질 정도로 이름이 높았지만 겸허한 자세가 몸에 밴데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로 평생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온 탓인지 명성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승려 구봉의 뒤를 잇는 제자들로는 아들인 송광무를 비롯하여 탱화가 고을영, 부안 출신의 김용대 화가, 단청화공 장병택, 불화가 승려 상봉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