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658
한자 光州忠孝洞窯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터
지역 광주광역시 북구 풍암제길 14[금곡동 157]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노성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63년 - 광주 충효동 요지 1차 발굴 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1년 - 광주 충효동 요지 2차 발굴 조사
문화재 지정 일시 1964년 8월 29일연표보기 - 광주 충효동 요지 사적 제141호 지정
소재지 광주 충효동 요지 - 광주광역시 북구 풍암제길 14[금곡동 157]지도보기
성격
문화재 지정 번호 사적 제141호

[정의]

광주광역시 충효동에 있는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까지 분청사기와 백자를 굽던 가마터.

[내용]

고려시대 중앙에 진상하던 최고급 상감청자의 주생산지가 강진이었다면, 조선시대 최고급 분청사기의 주생산지는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충효동 일대의 무등산 자락이었다. 금곡동·충효동 일대가 분청사기 가마터로 적격이었던 이유는 질 좋은 흙과 풍부한 연료 때문이었다. 가마터 위쪽의 고개 이름이 '백토재'로 불린 이유가 이를 뒷받침해 준다. 실제로 15세기 세종 때에 이곳에 가마터가 있었음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무진군 동쪽 이점(梨岾)[배재]에 자기소가 한 곳 있고, 군 북쪽에 도기소가 한 곳 있다.”라는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1963년과 1991년 2차례에 걸친 발굴 결과 충효동 요지는 왕실에 진상된 최고급의 분청사기 생산지였고, 조선 전기의 도자기 발달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주요 유적임이 확인되었다. 무등산 가마터에서 출토된 그릇에는 ‘무진내섬’, ‘내섬시’, ‘박덕지’, ‘광상’, ‘광이’, ‘정윤이’, ‘광’, ‘어존’ 등 각종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들 명문은 납품처나 품질 표시, 제작자, 제작지 및 제작 연대를 알려 준다. 명문 ‘내섬시’는 납품하는 중앙 관청이 어디인지를, 명문 ‘박덕지’는 당시 도공의 이름, 명문 ‘광’과 ‘무진’은 제작지를 의미한다. 또한, 귀얄로 분장된 마상배[말 위에서 술을 마실 때 쓰는 잔]의 바깥 면에는 한글로 ‘어존’이 음각되어 있다. 이는 도자기에 한글 명문이 새겨진 우리나라 최초의 사례로, 지방에까지 한글 보급이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

제작 시기와 관련된 명문으로는 무진 내섬시의 ‘무진(茂珍)’과 ‘성화(成化)’라는 연호가 새겨진 묘지가 주목할 만하다. 명문 ‘무진’은 1430년부터 1451년 사이에 사용된 전라도 광주 지역의 옛 이름이며 ‘성화’는 1465년부터 1487년에 사용된 중국 명나라 헌종의 연호이기 때문이다.

[변천]

광주 충효동 요지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곳은 불을 지폈던 아궁이 좌측면의 벽면에 쌓인 3.5m 높이의 파편 퇴적층이다. 9개의 층위를 가진 퇴적의 가장 아래층에서는 인화분청, 바로 위에서는 귀얄분청, 맨 위층에서는 백자가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고려청자가 분청사기를 거쳐 백자로 발전되는 변화 과정과 고려청자가 인화분청에서 귀얄분청으로 변형되고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위치]

광주 충효동 요지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분청사기박물관 내에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광주 충효동 요지는 1963년과 1991년 2회에 걸쳐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1963년 국립중앙박물관의 발굴 결과 가마터 및 상감청자 파편을 비롯하여 분청사기와 백자 등 다양한 자기편들이 출토되었고, 1991년 국립광주박물관의 발굴로 4기의 가마터가 확인되고 세종 이후부터 임진왜란 이전까지 분청사기를 중심으로 그 전 단계인 말기 청자와 그 후 단계인 백자 생산지이었음도 밝혀졌다.

[현황]

광주 충효동 요지에서 출토된 분청사기 등은 무등산 분청사기 전시실에 보관되어 있으며, 사적으로 지정된 2호 가마터는 보호각을 씌워 광주역사민속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광주 충효동 요지는 고려청자가 분청사기를 거쳐 백자로 발전하는 변화과정뿐만 아니라 인화분청에서 귀얄분청으로 발전되는 과정을 알려 주는 가마터로서, 조선 전기 도자 발달사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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