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8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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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忠信 |
영어공식명칭 | Jeong Chungshin |
이칭/별칭 | 가행(可行),만운(晩雲),충무(忠武)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바른 |
[정의]
조선 전·후기 광주 지역 출신으로 진무공신에 책봉된 무신.
[가계]
정충신(鄭忠信)[1576~1636]의 본관은 하동(河東)이며,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晩雲),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정지(鄭地)의 9대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임피현령(臨陂縣令)을 지낸 정천(鄭荐), 할아버지는 정석주(鄭錫柱), 아버지는 정윤(鄭綸)이고, 어머니는 이인조(李仁祚)의 딸 영천이씨(永川李氏)이다. 부인은 하양허씨(河陽許氏)로 후사가 없고, 측실에게서 3남 2녀를 얻었다. 아들은 정반(鄭䃑), 정빙(鄭砯), 정문(鄭砇)이다.
[활동 사항]
정충신은 1576년(선조 9) 광주 지역에서 태어났으며, 1592년 임진왜란 중 17세의 어린 나이로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활약하였으며, 그해 가을 행재소에서 실시한 무과에 급제하였다. 1608년 조산만호(造山萬戶)에 제수되었고, 이후 볼하첨사(乶下僉使), 포이만호(包伊萬戶), 만포첨사(滿浦僉使), 평안도 병마우후(平安道兵馬虞候), 의주부윤(義州府尹), 안주목사 겸 방어사(安州牧使兼防禦使) 등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1등 공신에 책훈되어 갈성분위출기효력진무공신(竭誠奮威出氣效力振武功臣)의 호를 받고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졌다.
1633년 청에 대한 세폐 납부를 찬성하였다가 당진에 유배되었고, 해서(海西), 장연(長淵)으로 이배되었으나 한 달도 되지 않아 풀려났다. 이때 정충신은 14년 만에 고향 광주(光州)의 옛집으로 돌아와 시조의 묘소를 수리하고 산수를 즐기며 유유자적하였다. 1634년 서용(敍用)되어 포도대장 겸 내섬시제조(捕盜大將兼內贍寺提調)에 제수되었다. 1636년 5월 4일에 병이 심해져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정충신의 저술로는 『만운집(晩雲集)』, 『금남집(錦南集)』 등이 있다. 『만운집』은 1672년 후손 정도언(鄭道彦)이 편집하였고, 1699년에 정문흥(鄭文興)이 간행하였다. 규장각 도서 등에 소장되어 있다.
[묘소]
정충신의 묘소는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에 있다.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서산 일대의 토지를 하사받은 정충신이 생전에 자기의 묘소를 이곳에 정하였다. 정충신 묘소는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정충신은 1685년(숙종 11) 8월에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받았다. 정충신은 광주 지역에 있었던 편방사(片坊祠)와 서산의 진충사(振忠祠)에 배향되었다. 진충사는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에 있으며,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매해 4월 25일에 제사를 지내며, 진충사 전시관에는 정충신의 유품이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