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1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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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元淳 |
영어공식명칭 | Choe Wonsun |
이칭/별칭 | 석초,석아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효선 |
출생 시기/일시 | 1876년 12월 18일 - 최원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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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13년 - 최원순 광주공립보통학교 졸업 |
수학 시기/일시 | 1914년 - 최원순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 졸업 |
수학 시기/일시 | 1923년 - 최원순 일본 와세다대학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최원순 조선청년독립단 설립, 2.8독립선언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1922년 - 최원순 조선유학생학우회 순회 강연단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 최원순 『동아일보』 입사 및 무명회 조직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8월 22일 - 최원순 『동아일보』에 일제의 식민통치를 비판하는 글을 실어 옥고를 치름 |
활동 시기/일시 | 1933년 - 최원순 계유구락부 활동 |
몰년 시기/일시 | 1936년 7월 6일 - 최원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20년 - 최원순 건국포장 추서 |
출생지 |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수기옥정 293번지 |
학교|수학지 | 광주서석초등학교 - 광주광역시 동구 제봉로 82번길 26[서석동 14-1] |
학교|수학지 | 경기고등학교 - 서울특별시 강남구 영동대로 643[삼성동 74-4] |
학교|수학지 | 와세다대학 - 일본 도쿄 |
성격 | 독립운동가|언론인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동아일보』 편집국장 대리|신간회 경성지회 간사 |
[정의]
일제강점기 2.8독립선언을 주도하고 식민통치를 비판한 전라남도 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개설]
최원순(崔元淳)[1876~1936]은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수기옥정(須奇屋町) 293번지[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 수기동]에서 태어났다. 호는 석초(石蕉), 석아(石啞)이다. 1919년 일본에서 유학생들과 함께 2.8독립선언을 주도하였으며, 『동아일보』 기자로 일제의 식민통치를 비판하는 글을 실어 옥고를 치렀다.
[활동 사항]
최원순은 1910년 광주공립보통학교[지금의 광주서석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1913년에 졸업하였으며, 서울로 유학을 가 경성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고등학교] 사범과를 다닌 뒤 2년간 교사로 재직하였다.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이상재, 한용운, 주시경, 최남선 등을 찾아 역사 연구에 정진하였다. 방학 중에는 전라남도 광주에 내려와 신문잡지종람소(新聞雜誌縱覽所)에서 최춘열, 강석봉, 최한영 등과 함께 계몽 활동을 하였다. 이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과로 유학하였다.
일본 유학 중 백관수, 최팔용, 김철수, 이광수, 정광호, 변희용 등 유학생들과 함께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을 설립하고 조선청년독립단 명의로 독립선언문과 결의문을 발표하기로 계획하였다. 최원순은 전략상 독립선언문 서명에는 참여하지 않고 거사 이후의 뒷일을 수습하는 역할을 맡았다.
1919년 「2.8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등사하고 2.8독립선언의 막전 막후에서 활동하였으며, 이후 3년간 조선유학생학우회(朝鮮留學生學友會) 순회 강연단으로 활동하였다. 유학 중 「이춘원에게 문하노라」라는 글을 통하여 이광수가 1922년 5월 『개벽』에 발표한 「민족 개조론」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1923년 3월 와세대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1923년 6월 16일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출신의 현덕신과 결혼하였다. 결혼 후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하여 무명회(無名會)[언론인 단체]를 부활시켰으며, 1925년 1월 31일 무명회 임시총회 자리에서 '전조선기자대회' 개최를 제안하는 등 언론 활동을 펼쳤다. 1926년 8월 22일 서울에서 『동아일보』 기자로 『동아일보』 제1면에 「횡설수설」이라는 제목으로 일제의 식민통치를 비판하는 글을 실어 옥고를 치렀다. 복역 후 『동아일보』 정치부장으로 있다가 편집국장 대리를 맡았다.
1927년 2월 서울에서 안재홍 등과 신간회 발족에 참여하고 신간회 경성지회 간사로 활동하였으며, 「극동 정국의 장래」, 「일본 정국의 추세」와 같이 국제 정세와 동아시아 정세를 파악하는 글을 발표하는 등 비평가로도 활동하였다.
최원순은 옥고를 치르는 과정에서 발병한 폐병으로 인해 전라남도 광주로 낙향하였으며, 1933년 계유구락부(癸酉俱樂部)의 일원으로 지역사회의 변혁과 궁민 구제를 위해 활동하였다.
최원순은 1936년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202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