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6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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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製金樓|製錦樓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별 |
[정의]
조선 후기 광주 지역에 세운 2층 규모의 정자.
[개설]
제금루는 1848년 목사(牧使) 윤치용(尹致容)[1800~?]이 설립하였다. 제금루에 대한 기록은 1879년 간행된 『광주읍지(光州邑誌)』와 1935년 간행된 『호남지(湖南誌)』, 1964년 간행된 『광주지(光州誌)』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제금(製金)은 『춘추좌씨전』에 나온 말로 비단으로 옷을 지어 입히듯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겠다는 다짐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러한 뜻에서 누각의 이름을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제금루의 창건(創建)과 중수(重修)가 모두 관아의 목사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생각할 때 개인 소유보다는 공공재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덕암(德巖) 나도규(羅壽圭)가 지은 시 「제금루즉사(製錦樓卽事)」에도 제금루가 등장하는데, 시구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제금루는 관원들이 공무 수행 중 쉬는 시간에 휴식처로 사용하던 공간임을 알 수 있다.
[위치]
문헌상으로 제금루가 “하모당(何暮堂)의 서쪽에 있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 기록만으로는 제금루의 정확한 위치를 찾기 힘들다. 다만, 광주읍성 내 아사(衙舍) 정문 쪽에 있었는데, 지금의 옛 전라남도청 앞 광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변천]
1855년에 목사(牧使) 홍재응(洪在應)이 제금루를 중수(重修)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1877년에 헐렸다. 소빈헌(笑嚬軒)과 월소루(月小樓)가 불났을 때 제금루도 화마를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
건물은 2층이었고 앞면 3칸으로 객사 정문인 황화루(皇華樓)와 규모가 비슷하였다. 나주에 있는 옛 관아 정문인 정수루(正綏樓)와도 비슷한 크기였다.
[현황]
현재 제금루는 남아 있지 않으나, 다만 기록을 근거로 그 존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삼정(三政)이 극도로 문란해지면서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민란이 일어났던 시기에 제금루도 민란의 영향으로 사라지게 된 것은 아닐까 짐작된다.
[의의와 평가]
제금루가 실존하였던 시간은 20년 안팎에 불과하지만, 남겨진 기록을 통해 제금루에서 선조(先祖)들이 광주읍성의 멋과 여유를 즐겼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