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50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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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不義-抗拒-光州學生獨立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선화 |
[정의]
1929년 11월 3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시작하여 1930년 3월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민족 차별과 민족 차별 교육에 항의한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
[개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20년대 일제의 식민통치 하에서 일제에 저항한 항일민족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중심에는 학생이 있었고, 이는 1920년대 민족운동에서 학생운동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20년대 후반 사회의 모습]
3.1운동을 계기로 일제의 통치 방식은 변화하였다. 이른바 문화통치를 실시하였는데, 3.1운동과 같은 거족적인 저항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일제는 아주 제한되지만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허용했다. 이에 따라 각종 단체들이 조직되었고, 그 중 청년단체의 출현은 주목할 만하였다. 이들은 1920~30년대 각종 농민운동, 노동운동, 사회운동을 이끌 주역으로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인이 그렇게 염원하던 중등교육기관도 세워졌다. 이렇듯 1920년대에는 많은 학생·사회·노동 단체들이 나타났다. 한편 한국인들은 기존의 교육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교육에 대한 요구를 하였는데, 주된 내용은 우리 민족만의 교육, 일본인과의 차별없는 교육과 고등교육 등을 요구하였다. 그 결과 제2차 조선교육령이 1922년 2월 발표되었다. 제2차 조선교육령에서는 학교 종류와 수업 연한이 일본과 동일한 학제를 채택하였다. 이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동일한 수준에서 교육하는 것처럼 보이려 하였지만 형식적일 뿐이었다. 우리 민족이 그토록 원하였던 중등 교육을 일제는 일부만 허용하였는데, 이때 조선인이 다닐 수 있는 고등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전라도 광주 지역에서는 광주고등보통학교가 1920년에 설립되었다.
1920년 광주고등보통학교 설립을 시작으로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가 설립되었고, 1929년 1월에 당시 광주에는 8개의 중등교육기관과 18개의 초등교육기관, 3개의 유치원 등 45개 이상의 교육기관이 있었다. 이 학교 중 1910년대 설립된 학교는 2개뿐이었고, 33개 이상이 1920년대에 설립되었다.
전남지방의 청소년과 청년들이 광주로 진학을 하면서 광주는 자연스럽게 청년 학생의 숫자가 증가하였다. 이들은 식민통치의 민족적 차별을 가장 예민하게 느낄 수 있었고, 차별에 그대로 노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 민족은 다시 한번 민족적인 만세운동을 시도하였다. 6.10만세운동이 그것이다. 비록 6.10만세운동은 사전에 발각되어 3.1운동처럼 전국 곳곳에서 우리 민족이 만세 시위를 전개하지 못했지만, 이후 민족운동의 방향이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920년대의 이러한 사회적인 분위기에서 많은 사회·노동·학생 단체들이 조직되었다. 이 단체를 이끌었던 것은 청년 단체였다. 광주의 청년단체 중 학생운동과 관련이 있는 단체는 광주청년회, 광주청년동맹, 전남청년연맹 등이다. 특히 이 단체와 관련있는 인물 중 강석봉, 강해석, 김재명, 장석천, 지용수 등은 성진회 및 독서회의 결성에 관여하며 학생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하였다. 광주청년동맹과 전남청년연맹은 사회주의적 색채를 띤 단체였고, 여기에서 임원으로 활동하였던 이들은 성진회와 독서회 등 비밀결사와 사회주의 계열을 연결하였다.
6.10만세운동 이후 사회주의 운동 내에서는 "노농운동과의 결합 또는 정치투쟁으로의 전화를 통해 대중운동으로서의 학생운동을 강화하는 방향"의 학생운동론이 제기되었고, 이들은 이에 호응하여 학생 비밀결사 조직 건설을 지원하였다. 성진회 창립을 주도한 왕재일은 자신들의 임무를 “사회주의 실현의 전위투사로서 먼저 이론을 연구하고 점차 실행에 옮기는 것”으로 규정했으며, 장재성은 학생들에게 “민족의 선각자가 되어 농민과 노동자를 지도할 의무”를 강조하였다. 성진회 참여에 깊숙이 관계하였던 강해석은 “광주고보, 농업학교를 졸업하면 사회에 나가 노동자·농민에게, 사범학교를 졸업하면 교직에 나가 학생들에게 반일독립사상을 선전할 것”을 주문하였다. 이렇듯 1920년대 일제의 통치방식이 바뀌며 우리 민족은 사회 전반에서 일제에 저항하는 방법론이 변화하였다. 사회 전반에서 각 부문 운동이 성장하면서 전국적인 조직이 나타났고, 학생운동도 민족운동을 이끌만큼 1920년대를 거쳐 발전하였다. 이러한 사회운동의 발전에는 사회주의의 영향이 컸다.
[1920년대 후반 학생운동의 변화]
1920년대 중반을 지나며 학생운동의 경우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1920년대 학생운동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동맹휴학[이하 ‘맹휴’로 줄임]이었다. 하지만 6.10만세운동 이후 그 성격에 변화가 나타났다. 6.10만세운동 이전 맹휴의 원인은 교장 및 교사 배척, 교수 방법 및 교과과정 시정, 학교 시설의 확충, 학교의 승격 등 교내 문제가 주류를 이루었다. 6.10만세운동 이후에는 노예교육 철폐, 조선 역사의 교수, 교내에서의 조선어 사용, 학생회의 자치 허용, 언론집회의 자유 등의 구호가 나타났다. 이는 6.10만세운동 이전의 맹휴가 식민교육에 대한 저항이었다면, 이후에는 식민교육은 물론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이었다는 의미이다.
6.10만세운동을 전후하여 전개되었던 맹휴는 우발적이고 일시적이었는데, 점차 조직적이고 장기적인 형태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맹휴는 민족 모순을 더욱 뚜렷하게 부각시켰는데, 이렇게 된 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6.10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학생들의 역량이 성장하였다. 둘째, 신간회의 중앙 및 지방 조직이 결성되었고, 이 신간회가 여러 사회·민족운동에 개입하고 영향을 주면서 민족운동의 기반이 넓어졌다. 셋째, 민족교육의 이념이 ‘조선본위교육’이라는 이론으로 정립되어 식민교육에 대항할 수 있게 되었다. 넷째, 1920년대 나타난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외일보』 등 언론에서 ‘조선본위교육’에 대한 논설을 싣고 지원하였다.
학생운동의 조직과 방향도 새롭게 정립되었다. 6.10만세운동을 전후하여 학생운동 조직은 공개단체에서 비밀결사로 전환하였다. 또한 각 학교에 독서회와 같은 사회과학 연구를 위한 조직이 결성되었는데, 이는 학생운동이 서울에서 지방으로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개별 학교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여러 학교 학생들이 참여하는 비밀결사, 즉 연합성격을 띠는 단체도 조직되어 역량을 강화하였다. 광주의 성진회와 독서회중앙본부, 서울의 조선학생혁명단, 조선학생전위동맹, 대구의 신우동맹 등이 이와 같은 사례였다. 이런 학생 비밀결사가 중심이 되어 맹휴를 계획적이고 조직적이며 장기적으로 전개하였다. 또한 ‘식민교육 반대’에서 더 나아가 ‘식민통치 철폐’, ‘제국주의 타도’라는 구호까지 등장할 정도로 민족운동은 더욱 발전하였다.
일제 측 조사에 따르면 광주고보에서만 4회의 맹휴가 1923, 1924, 1927, 1928년에 일어나 관공립학교 중 전국 최다를 기록하였다. 이 밖에 공립학교인 광주농업학교에서 1923년과 1928년에,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1928년에, 사립학교인 숭일학교에서 1926년에 맹휴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초등교육기관인 광주공립보통학교에서 1927년에, 광주사립보통학교에서 1927~1928년에 교원이나 학생들이 맹휴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1920년대 광주 지역의 학생운동]
1923년 1월 광주고보에서 일본인 교사가 학생을 구타하자 1~3학년 학생들이 맹휴에 나섰다. 이 맹휴는 학부형회의의 조정으로 학생들이 등교를 함으로써 철회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교장이 약속을 어기고 주동학생 5명에게 정학 처분을 내리자 이에 격분한 학생들이 다시 맹휴를 일으켰다.
1924년의 광주고보 맹휴는 한일 학생 간의 충돌에서 비롯되었다. 6월 광주고보생들과 일본인들로 구성된 구락부의 야구 시합이 열렸는데, 양측 사이에 시비가 일자 심판을 보던 일본인 의사가 달려들어 광주고보 선수들을 잡아당기고 꾸짖었다. 그러자 이에 흥분한 선수와 관중들이 그를 구타하여 중상을 입혔고, 경기는 중단되었다. 이후 광주고보 일본인 교장은 경찰에 학생들에 대한 조사를 의뢰하였고, 김재형, 윤처형, 지창수, 최동문 등이 불려가 취조를 받았다. 이에 분개한 학생들이 강당에 모여 학생들의 석방과 교장의 사직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학교측은 학생 400여 명에게 무기정학 처분을 내렸고, 학생들은 교장이 사퇴할 때까지 맹휴를 벌이기로 결정하여 교장의 비행을 담은 진정서를 당국에 제출하였다. 학부형들은 학부형회의를 열었는데 전남학부형대회에는 최흥종 목사가 사회를 맡았다. 이는 광주고보의 맹휴가 사회적인 문제로 떠올랐음을 알 수 있다. 결국 학교측은 맹휴 주동자 10여 명에게 퇴학 처분을 내리고 20여 명에게는 사과하지 않으면 제명시키겠다는 통지문을 보냈다. 이에 다시 학생들은 ‘대동단결’하여 학생대회를 열기로 결정하였다. 이 맹휴는 9월이 되어 수습되었지만 주동자인 4학년 고광우, 국채덕, 지창수, 최헌주 등이 퇴학 처분을 받아 학교를 떠났다. 이처럼 1924년 맹휴는 한일 민족 간의 분쟁으로 시작하여 사회적 이목을 끌었지만 조선인 학생들만 피해를 입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학교측의 강경한 대응과 경찰의 개입에도 3개월이나 지속될 정도로 학생들의 운동 역량이 발전하였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또한 한일 학생 간은 물론 교장, 교원과 학생 간 갈등이 더욱 심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1927년 광주고보의 맹휴는 만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길에 평양고보를 방문하였던 학생들이 그곳의 우수한 시설을 보고 자극을 받아서 일어났다. 평소 광주중학교보다 시설이 낙후된 것에 불만을 갖고 있던 학생들은 같은 고보이면서도 우수한 시설을 가진 평양고보를 보고 분개하여 맹휴를 일으켰다. 몇 년 전부터 학생들은 물리·화학 교실의 설치 등을 학교측에 요구하였으나 당시 일본인 교장은 이를 무시하였다. 그러다 학생들이 맹휴를 일으키자 수용 의사를 밝히면서 사태가 수습되었다.
1928년 6월 이른바 ‘이경채 사건’을 계기로 광주고보는 격렬한 맹휴가 일어났다. 광주고보생 이경채는 1927년경부터 송정리보통학교 동창인 박병하, 윤해병 등과 함께 사회과학 공부를 하다 1928년 3월 사회주의 서적을 참고하여 3종의 선언서를 작성하였다. 이들은 이 선언서를 등사하여 광주의 번화가와 광주역전, 송정리역전 등에 붙이고 각 중등학교와 경찰서에 보냈다가 검거되었다. 이른바 ‘광주불온문서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으로 청년·학생 수십 명이 검거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들 중 8명이 예심에 넘겨졌고, 7월 강해석, 박승남, 조칠성, 지창수, 한길상 등은 범죄 혐의를 찾지 못해 석방되고 박병하, 윤해병, 이경채 등만 기소되었다. 이들에 대한 최종 판결이 나오기도 전인 6월 19일 학교측에서는 이경채의 부친을 불러 권고 퇴학 처분을 내렸고, 학생들은 가혹한 처사라며 교장에게 항의하였다. 그럼에도 교정은 이를 철회하지 않고 학부형회의를 소집하자 이에 분개한 4~5학년 학생들이 24일 학부형회의 석상에서 진정서를 배포하였다. 이에 학교측이 25일 주동자 11명에게 근신 처분을 내리자 26일 2학년생들은 교장에게 진정서를 제출하여 교육 여건의 개선과 함께 이경채에 대한 학교측의 명확한 입장을 촉구하였다. 이어 학생들은 맹휴에 나섰고, 학교측은 다시 주동자 72명에게 퇴학, 281명에게 무기정학 처분을 내렸으며, 경찰에서는 이들에 대하여 감시를 하였다. 이에 학부형들은 학부형대회를 열고 중재에 나섰으나 학교측의 방침은 바뀌지 않았으며, 7월 4일부터 1학년생도 맹휴에 동참하자 5일부터는 1학년생을 대상으로 1주일간 휴교 조치를 내렸다.
6월 29일에는 광주농업학교생들이 맹휴를 일으켰다. 농업학교생들은 평소 불만을 갖고 있던 일본인 교사에게 사직을 권하는 한편 교장에게 진정서를 제출했나 반응이 없자 맹휴에 나섰다. 여기에는 2~4학년 학생 115명이 참여했다. 학교측은 주동자 12명에게 퇴학, 102명에게 무기정학을, 나머지 학생들에게 근신 처분을 내리자 이들은 동원부, 연락부, 정탐부, 모계부(謀計部) 등을 조직하여 학교측의 동정을 살피고 이탈자를 감시하였다. 이들은 “식민지 노예교육제도를 철폐하라. 일한공학제 실시는 절대로 반대한다” 등의 내용을 담은 격문을 만들어 하급생을 시켜 뿌리도록 하였다. 또한 학생들의 동정을 탐지하는 교사 앞으로 편지를 보내 꾸짖기도 하였다. 학생들은 폐교까지 불사하며 최후까지 투쟁하겠다는 결의를 다졌으나, 김윤성, 김재룡, 나석현, 송성수, 유상걸 등 주동자들이 체포되어 취조를 받은 뒤 재판에 회부되었다. 1928년 맹휴는 많은 학생들이 퇴학과 무기정학 등의 징계를 받아 타격이 컸고, 뚜렷한 성과를 얻지도 못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장기적이고 효율적인 투쟁을 위해 ‘맹휴중앙본부’가 조직되어 투쟁 역량을 결집시킬 수 있었다.
맹휴본부에서는 학부형에게 통고문을 보내 맹휴의 정당성을 알리고 지지를 호소하는 일도 하였다. 주로 ‘민족 모순’을 부각시키고, ‘노예 교육’을 거부하는 등의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맹휴로 1928년 9월에는 광주고보의 김몽길, 여도현 등이 ‘소행 불량’을 이유로 권고퇴학 처분을 받았고, 이에 대해 김경술, 김몽길, 여도현, 하길담 등은 이듬해 3월 졸업식에서 ‘교우회 자치, 조선인 본위의 교육 실시, 노예 교육에 대한 항쟁, 독서의 자유 획득, 학원 내 경찰 투입과 간섭 반대' 등의 내용이 담긴 격문을 뿌렸다. 이들은 교장실에 들어가 퇴학의 이유에 대해 따지다 결국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처럼 1920년대 광주에서는 맹휴가 계속 이어졌으며, 특히 1928년 ’이경채 사건‘을 계기로 맹휴중앙본부가 결성되었다. 맹휴중앙본부 구성원들의 투쟁 방식은 학생운동이 본격적으로 민족운동으로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성진회의 결성과 해산]
일제 측의 자료와 당시 주장에 의하면, 성진회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일으킨 단체이다. 일제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 직후 많은 학생들을 체포하였고, 이들을 조사하여 ’성진회사건‘이라 발표하였다. 성진회원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이끈 중추였다는 것이었다.
성진회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거나 서로 일치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성진회는 광주고보의 장재성, 왕재일과 농업학교의 박인생 등이 중심이 되어 회원을 규합하였다. 1926년 11월경 최규창의 하숙집에 16명이 모여 ’공산제도의 실현‘과 ‘조선민족의 독립’을 목적으로 성진회를 결성하였다. 성진회 회원 16명은 다음과 같다. 광주고보생은 김광용, 김창주, 안종익, 왕재일, 임주홍, 장재성, 정우채, 채영석, 최규창 등 9명이었다. 농업학교생은 국순엽, 김한필, 문승수, 박인생, 정남균, 정동수, 정종석 등 7명이었다.
성진회원들은 사회주의 계열 청년들의 지도를 받으며 조선의 독립을 위해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투쟁 역량을 강화하려 하였다. 그렇지만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들은 왕재일, 장재성 등을 통하여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성진회는 존속 기간이 5개월에 불과하였고, 비밀결사였기에 드러내고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성진회 존속 기간 동안 광주에서 맹휴도 일어나지 않아 이들의 활동이 드러날 기회도 없었다.
성진회가 해산한 시점은 1927년 2~3월경이었다. 이들이 해산한 이유는 회원이 아닌 인척이 형사였다고 한다. 채영석의 처남이 형사였다고도 하였고, 친형이었다고도 한다. 1927년 3월 광주고보의 왕재일, 장재성, 안종익, 농업학교의 박인생, 정남균 등이 졸업하자 10명의 회원만 남게 되었고, 회원의 인척이 형사였던 상황과 함께 더 이상의 존속이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학생운동의 발전으로 성진회의 남은 회원은 각 학교에서 비밀조직을 지도하고 조직하는 데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 우선순위였을 것이다. 성진회는 1927년 3월경 정남균의 집에서 형식상 해체되었다.
학생운동의 성장 속에서 성진회와 사회주의 청년들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1927년 3월 성진회 핵심 인물들이 졸업하자 강해석, 장석천 등이 회원 몇 명을 요리집으로 불러 사회주의 실현을 위한 당부를 했다고 한다. 성진회는 6.10만세운동 이후 학생운동 조직이 서울의 공개적인 전국 조직에서 지방의 비밀결사 형태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결성되었고, 시기적으로도 매우 앞섰다는 의미를 가진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개는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단계는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한일 학생 간의 충돌부터 11월 광주, 목포, 나주에서의 맹휴와 시위까지이다. 2단계는 12월 서울 학생들의 맹휴와 시위이고, 3단계는 1930년 1~3월 전국적 맹휴와 시위이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있었던 한일 학생 간의 충돌은 이튿날에도 계속되었다. 광주에서 나주로 내려가는 기차 속에서 한일 학생 간에 격투가 있었는데, 어제의 충돌에서 경찰의 비호를 받은 일본인 학생들에 대한 보복이었던 셈이다. 30일과 31일의 사건은 광주고보생과 광주중학생 몇 명이 관련된 소규모 충돌이었으나 11월 1일부터는 양상이 변화하였다.
11월 1일 광주역에서 양교 학생 수십 명이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 날 사건은 일본 학생들이 계획적으로 일으켰다. 한일 학생들이 광주역 철로에서 서로 대치하였고, 양교 교사들의 제지와 경찰의 출동으로 격투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11월 3일은 일요일로 일왕 메이지(明治)의 생일인 메이지절이자 전남의 산견 6만 석 돌파를 축하하는 행사가 열린 날이기도 하였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각 군에서 많은 인파가 동원되었다. 광주부는 외관상 축제 분위기였다. 조선인 학생으로서는 불만이 많았다. 민족의 축일인 개천절 대신 메이지절과 일제의 수탈을 기념하기 위해 일요일에 학교에 나와야 하였기 때문이었다. 광주고보에서는 9시에 강당에서 기념식을 거행한 뒤 학생들에게 자유롭게 신사에 참배하도록 하였다. 만일의 산태에 대비해 교사들에게 시내 순시를 지시하였고, 광주역에 교사를 배치해 충돌을 막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11시경 수기옥정 우편소 앞에서 광주고보와 광주중학 학생들 간에 시비가 붙었다. 양측 모두 패를 지어 다니다가 부딪힌 것이 격투로 확대되었다. 수세에 몰린 광주 중학생들이 광주역 방면으로 달아났고, 고보생들이 뒤쫓아 광주역전에서 집단 난투가 벌어졌다. 결국 경찰과 교사, 소방대까지 출동하고서야 이들을 해산시킬 수 있었다. 학교에 돌아온 고보생들은 강당에 모였고, 학생들은 장작, 곤봉, 배트 등으로 무장하였다.
한국인 학생 통학단장인 농업학교생 최태주도 농업학교생들의 참여를 선언해 300여 명 시위대는 독서회 회원들과 5학년생들이 선두에 서서 시가로 진출하였다. 광주역에서 성저리를 지나 광주중학교로 진출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우체국을 거쳐 도립광주병원 쪽으로 행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광주여고보생들과 사범학교생들도 일부 합류하였다. 오후 3시경 학생들은 광주고보로 돌아왔고, 부상 학생을 입원시킨 뒤 해산하였다.
11월 4일 광주의 중등학교들은 3일간 임시휴교에 들어갔으며, 이날부터 경찰은 한국인 학생들을 검속해서 조사하였다. 경찰은 병원에 입원한 학생들을 찾아가 상처를 확인하였고, 11월 8일 모두 퇴원시켰다. 11월 12일까지 경찰은 72명을 검거하고 그 중 62명을 검찰에 송치하였다. 이들 중 광주고보생 44명, 농업학교생 13명, 사범학교생 5명 등이었으며 40명이 기소되었다. 이같은 삼엄한 분위기 때문에 한·일 학생들 간의 충돌은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장재성과 장석천은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애썼다. 11월 4~5일경 박오봉의 집에서 강석원, 국채진, 박오봉, 장석천, 장재성이 만나 전단을 작성하여 광주의 중학생들에게 살포하기로 하였다. 11월 6일 장재성은 "검거자를 우리 힘으로 구출하고, 교내 경찰관 침입에 절대 반대하자,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를 획득하자,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를 확립하자, 식민지노예교육제도를 철폐하자. 사회과학연구의 자유를 획득하자"는 내용의 원고를 작성하였다. 이 무렵 신간회 중앙본부를 비롯하여 서울의 사회단체·사상단체들도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조사위원을 광주에 파견하였다. 장석천은 11월 6일 강영석의 집에서 권유근과 부건을 만나 학생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서울에서 학생시위를 일으켜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였다. 7일 강영석과 권유근이 서울로 올라갔다
장석천·장재성 등은 두 차례의 임시휴교 끝에 학생들이 등교하는 11월 11일에 학생시위를 일으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11월 12일 학생시위 계획을 확정하고 장석천[광주 및 전국 학생의 지도], 장재성[광주 한국인 학생의 지도], 국채진[전남 도내 지방학생의 지도], 박오봉[직공 및 노동단체의 지도], 임종근[전남 도내 공립보통학교 교사와의 연락], 강석원[외래 동지와의 연락], 나승규[운동자금의 조달]는 일을 분담하였다.
11월 11일 장석천은 전단지를 작성하였다. 다음날인 11월 12일 광주고보와, 농업학교에 격문이 살포되었고, 학생들이 교실을 나오며 시위가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수기옥정 우편국과 궁동의 광주형무소를 거쳐 사범학교까지 행진하였고, 농업학교생들도 광주고보생들과 합류하였다. 11월 12일 연합 시위로 광주고보와 농업학교는 무기휴교에 들어갔다. 이날 동참하지 못한 광주여고보는 14일과 15일 기숙사생들이 독립가를 부르고 만세를 외쳤다. 사범학교생들도 14일 ‘구속학생 석방’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광주의 학생시위에 가장 먼저 호응한 것은 목포상업학교였다. 한일 공학인 이 학교는 1929년 당시 한국인 학생 122명, 일본인 학생 130명이 다니고 있었고, 학교측이 차별한다는 이유로 6월에 맹휴를 벌였다. 목포상업학교는 1929년 독서회가 조직되어 회원이 20명 정도였다. 이들은 11월 9~10일경 장재성을 만나 면담을 나누었다. 11월 19일 시위를 계획하고 4학년생 박상준, 임성춘, 3학년생 박종식, 백상휴, 오상록, 이광우, 이인형, 정찬규, 2학년생 박사배, 양재욱, 이재실 등이 논의하였다. 19일 오후 1시 조선인 학생 100여 명은 3대로 나누어 시위에 나섰다. 이들은 전단을 뿌리며 시위를 벌였는데, 광주의 학생 시위 때 격문보다 사회주의적인 성향이 짙었다. 이날 시위로 학생 32명이 검거되었으며, 신간회 목포지회 간부와 청년동맹원 10여 명도 검거되었다. 그렇지만 학생들은 11월 22일 오전 다시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에서 학생 4명이 검거되었다. 두 차례의 시위로 구속된 학생 36명, 무기정학·근신 처분을 받은 학생이 70명에 이르렀다.
나주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나주역사건의 본거지였다. 나주공업보습학교생 유찬옥은 11월 11일 신간회 나주지회를 찾아가 박공근, 박동근, 양영택 등 청년들과 시위운동에 대해 상의하고 협조를 부탁하였다. 이들은 27일 장날에 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전단의 내용은 유찬옥이 광주와 목포에 뿌려진 전단을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나주에서는 보통학교생들까지 함께 나선 시위였다. 농업보습학교생 47명과 공립보통학교 5~학년생 130여 명이 교문을 나와 연합시위에 나섰던 것이다. 이날의 시위로 16명이 검거되어 조사를 받은 뒤 유찬옥, 홍민후와 나주지회 박공근, 양영택, 청년연맹 나주지부장 박동희, 의원 김형호 등이 송치되어 치안유지법과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처벌을 받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국 확산]
광주학생들의 시위는 언론에 보도되어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다. 서울의 사회단체, 청년단체 등과 신간회는 학생시위를 전국으로 확대시키고자 하였다. 광주의 강영석은 권유근과 함께 서울로 와서 준비에 나섰고, 장석천도 뒤에 올라와 각 단체 간부들과 계획을 세웠다. 서울의 연합 시위에는 장석천의 역할이 중요하였다.
12월 2일 저녁부터 3일 아침까지 서울의 각 학교에 격문이 뿌려졌다. 직후 많은 학생들과 조선학생전위동맹·조선청년총동맹 인사들이 검거되었는데도 예정대로 서울의 각 학교에서 계획이 실행될 수 있었던 것은 각 학교에 조직되었던 독서회 등의 역할이 컸다. 12월 5~8일 학생시위는 학교별로 산발적으로 이루어졌으나 12월 9일에는 대규모 연합시위로 발전하였다.
12월 서울 지역 학생들의 투쟁은 30여 개의 남녀 전문학교·중등학교·각종 학교·보통학교 학생 1만 2000여 명이 참여하여 1,400여 명이 검거된 대규모 학생운동이었다. 독서회를 비롯한 학교별 운동세력 간의 긴밀한 협력, 조선학생전위동맹·조선청년총동맹 등 단체와의 조직적 연계, ‘진정서 제출⟹맹휴⟹연설⟹시위’, ‘개별시위⟹연합시위’, ‘제1대⟹제2대’로 이어지는 체계성, 가두시위가 여의치 않자 재빨리 교내 시위와 동맹휴학으로 전환하여 투쟁을 지속하는 기민성, 격문에서 사회주의적 색채를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더욱 많은 참여를 유도한 대중성 등은 학생운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것이었고, 이후 학생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항일학생운동이 전국에서 맹렬히 펼쳐지는 데 광주 학생들의 투쟁이 ‘도화선’이었다면, 서울 학생들의 투쟁은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1929년 12월 서울 지역 학생운동의 영향을 받아 전국에서 맹휴·시위가 일어났다. 그 지역을 살펴보면 개성·동래·원산·춘천·평양·함흥 등이었다. 12월 지방에서 가장 먼저 맹휴가 일어난 곳은 충남의 공주고보였다. 12월 2일부터 시작된 맹휴는 8일까지 이어졌고, 영명학교·영명여학교 학생들도 이에 동조하였다. 12월 10일 개성 송도고보생들이 맹휴를 시작하였으며 호수돈여고보생들도 동조하려 하였으나 임시휴교로 무산되었다. 13일에는 개성공립상업학교, 개성학당상업학교 학생들이 맹휴를 시작하였다. 개성은 학생들이 맹휴를 벌였으나 시위로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12월 12일에는 인천상업학교생, 평북 선천의 신성학교에서 맹휴가 있었다. 신성학교는 시위를 시도하였다. 12월 14일 함남 원산의 루씨여고보생들은 맹휴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학교측이 조기방학을 실시하여 불발에 그쳤다. 같은 날 원산여고보의 한국인 학생 일부도 맹휴를 벌였다. 16일 원산상업학교 4학년생들은 백지동맹을 하였다.
평양에서는 중등학교·전문학교의 백지동맹이 전개되었다. 숭실전문은 12월 14일, 16일 광성고보·숭인학교·농업학교·평양여고보생 학생들이 백지동맹을 벌였다. 17일 숭실학교·농업학교가 백지동맹을 전개하였다. 평양의 12개 학교 중 9개 학교에서 백지동맹이나 맹휴가 있었으나 시위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함남 함흥고보는 16일 교내 시위를 벌였다. 가두시위를 계획했으나 주모자 34명이 검거되면서 무산되었다. 영생중학교와 영생고등여학교에서도 시위의 기운이 퍼지자 임시휴교에 들어갔다. 17일 함흥농업학교생들은 격문 1만여 장을 뿌리고 가두시위를 벌일 계획이었으나 사전 발각되었다.
함북 경성에서는 경성고보에 격문이 23일 살포되었다. 강원 춘천고보는 교내에서 격문을 뿌리고 만세를 부른 후 귀가하였다. 21일에는 백지동맹을 전개하였다. 부산에서 동래고보생들은 20일 맹휴를 벌였다.
지방의 학생들은 백지동맹이나 맹휴의 형태로 저항하다가 나중에 격문 살포와 시위를 계획하였다. 하지만 학교측이 임시 휴교·조기방학 등으로 대응하여 이에 대한 적절한 대안을 찾지 못했지만 이를 경험으로 1930년 전국적인 대규모 항일 학생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1930년 1월 개학과 함께 새로운 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광주고보·광주여고보·농업학교 학생들이 백지동맹에 나선 것이다. 광주에서의 백지동맹은 전국에 그 영향을 주었다. 1929년 12월 연합시위를 일으켰던 서울 지역의 학생들은 1930년 1월 개학을 하자 다시 시위를 계획하였다. 11일 시내 곳곳에 격문이 나붙기 시작하였다. 각 학교의 학생 대표가 모여 시위를 계획하였고 15일을 연합시위의 날로 계획하였다.
1월 15일 오전 서울 각 학교 학생들이 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돌입하였다. 시내 15개 중등학교 학생들이 참여하였다. 이후 1월 15~17일 집중적으로 시위가 있었다. 이 시위는 2월 20일까지 지속되었고 최소 25개교가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1월 27일에는 보성전문·연희전문·세브란스의전·법학전문·상공전문 등 전문학교에서 맹휴를 추진하였다. 맹휴 시도는 연희전문을 제외하면 실패로 끝났다. 이렇듯 서울에서의 학생시위는 비밀결사나 외부 사회단체·사상단체의 지원 없이 학생들만의 역량으로 추진되었다. 또한 서울에서는 보통학교 학생들이 참여하지 않았는데 중등학교가 다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각 지방의 학생운동은 경기지역은 5개 학교에서 참여하였다. 강원도의 경우 7개교가, 충청남도는 13개 학교가 참여하였고, 충청북도는 9개 학교에서 참여하였다. 전라남도는 제주를 포함하여 18개 학교가 전라북도는 16개 학교가 참여하였다. 경상남도는 28개 학교가 경상북도는 7개 학교에서 참여하였다. 북부 지방의 경우 평안남도는 39개 학교가, 평안북도는 15개 학교가 참여하였다. 함경남도는 27개 학교가, 함경북도는 27개 학교가, 황해도는 9개 학교가 참여하였다. 이렇듯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어1930년 3월까지 계속되었다. 해외에도 영향을 끼쳐 중국, 만주 지방, 미주 지역에까지도 확산되어 우리 민족의 독립을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