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7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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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克己 |
영어공식명칭 | Kim Geuk-ki |
이칭/별칭 | 예근(禮謹),지월당(池月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홍창우 |
[정의]
조선 전기 제주목사, 교리 등을 역임한 광주 출신의 문신.
[가계]
김극기(金克己)[1379~1463]의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자는 예근(禮謹), 호는 지월당(池月堂)이다. 『동국문감(東國文鑑)』 편찬에 참여한 문정공(文正公) 김태현(金台鉉)의 9세손이다. 아버지는 부정(副正) 김삼성(金三省)이다.
[활동 사항]
김극기는 고려 말인 1379년(우왕 5)에 광주 지역 평장동[지금의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에서 태어났다. 김극기는 『지월당유고』의 저자로 알려져 있으나, 상세한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도 김극기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으며, 『동문선(東文選)』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 작품이 산재해 있어 김극기의 문학관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다행스럽게도 문집인 『지월당유고(池月堂遺稿)』에 수록된 「지월당김선생행장(池月堂金先生行狀)」과 묘지명 「지월당선생묘갈명(池月堂金先生墓碣銘)」에서 김극기의 생애를 살펴볼 수 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김극기는 14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18세인 1397년(태조 6)에 무등산에 올라 증심사(證心寺) 등을 소재로 시를 썼으며, 문장으로 널리 알려진 뒤로는 전국에 이름난 고적을 유람하며 문학에 심취하였다. 1405년(태종 5)에 주변의 권유로 마지못해 과거에 응시하여 문과에 합격하였지만 관직에 뜻이 없었으며, 세종 때는 교리(校理)에 발탁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세종이 다시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임명하였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이후 김극기는 자신이 태어난 평장동에 ‘지월’이라는 정자를 짓고 독서에 심취하며 유유자적하다가 1463년(세조 9)에 사망하였다.
김극기의 지조와 절개는 죽은 뒤에도 후손들의 귀감이 되었는데, 김시습(金時習)은 김극기의 이름과 지절(志節)을 듣고 ‘지월당(池月堂)’이라는 글자를 직접 써서 보냈다는 일화가 전한다. 『광주읍지』에서도 “문무의 재주가 있고 기절(奇節)을 숭상하였다.”라는 등 김극기의 기절 숭상을 언급한 대목이 곳곳에 보인다.
[학문과 저술]
『지월당유고』는 김극기 및 김극기와 관련 있는 글을 모아 엮은 문집이다. 1823년(순조 23)에 13대손인 김경현(金景鉉)이 산재해 있던 김극기의 글을 모아 간행하였다. 전체 3권 1책의 목판본으로, 김수조(金壽祖)의 서문과 김경현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1권과 2권에는 시와 절구가 수록되어 있고, 3권에는 각종 기(記)가 실려 있다. 현재 전주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