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8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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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奇大升 |
영어공식명칭 | Gi Daeseung |
이칭/별칭 | 명언(明彦),고봉(高峯),존재(存齋),문헌(文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광주광역시 광산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홍창우 |
출생 시기/일시 | 1527년 - 기대승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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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46년 - 기대승 향시 진사과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549년 - 기대승 진사, 생원 입격 |
활동 시기/일시 | 1558년 - 기대승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58년 - 기대승 권지승문원부정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62년 - 기대승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63년 - 기대승 승정원주서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64년 - 기대승 부수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65년 - 기대승 병조좌랑, 이조정랑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566년 - 기대승 사헌부지평, 홍문관교리, 사간원헌납, 의정부검상, 의정부사인 등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567년 - 기대승 장령, 홍문관응교, 전한 등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571년 - 기대승 홍문관부제학, 이조참의 등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72년 - 기대승 대사간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572년 - 기대승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578년 - 기대승 추모 월봉서원 창건 |
추모 시기/일시 | 1646년 - 기대승 시호 문헌(文憲) 추증 |
묘소|단소 |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곡길 78-27[광산동 산135] |
사당|배향지 | 월봉서원 -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곡길 133[광산동 452] |
사당|배향지 | 빙월당 -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곡길 133[광산동 452] |
성격 | 문관|학자 |
성별 | 남 |
본관 | 행주(幸州) |
대표 관직 | 부제학|이조참의|대사간 |
[정의]
조선 전기 광주 지역 출신으로 부제학, 이조참의,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성리학자.
[가계]
기대승(奇大升)[1527~1572]의 본관은 행주(幸州)이며,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峰)·존재(存齋),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아버지는 물재(勿齋) 기진(奇進)이고, 어머니는 진주강씨(晉州姜氏)이다. 부인은 이임(李任)의 딸 함평이씨(咸平李氏)이며, 기대승은 이씨와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기효증(奇孝曾), 차남은 기효민(奇孝閔), 삼남은 기효맹(奇孝孟)이고, 장녀는 김남중(金南重)에게 출가하였다.
[활동 사항]
기대승은 1546년(명종 1) 향시(鄕試), 1549년(명종 4) 사마 양시를 거쳐 1558년(명종 13) 식년시에 을과 장원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됨으로써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보다 7년 전인 1551년(명종 6)에 알성시(謁聖試)에서 급제할 수 있었지만, 당시 외척이었던 윤원형(尹元衡)이 기대승을 꺼려 점수를 낮게 주는 바람에 낙제하였다.
1562년(명종 17)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에 제수되었고, 1563년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1564년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었다. 1565년 병조좌랑(兵曹佐郞), 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쳐 1566년(명종 21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1567년(명종 22)에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명 사신을 접대하였다. 선조가 즉위한 후에는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 전한(典翰)이 되었고, 1571년(선조 4)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이조참의(吏曹參議), 1572년(선조 5)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으나 지병이 있어 체직(遞職)을 요청하였다. 기대승은 고향으로 내려가던 중 볼기에 종기가 생겨 고부(古阜)에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기대승은 일재(一齋) 이항(李恒),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퇴계(退溪) 이황(李滉) 등 당대 내로라하는 학자에게서 수학하였다. 특히 8년에 걸친 이황과의 이른바 ‘사단칠정논쟁’은 한국 유교의 전개 과정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이이와 성혼 사이에서 다시 한번 논의되기도 하였다.
기대승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고봉집(高峯集)』, 『주자문록(朱子文錄)』, 『논사록(論思錄)』 등이 있다. 『고봉집』은 1629년(인조 7) 기대승의 손녀사위 조찬한(趙纘韓)이 간행하였다. 『논사록』은 기대승이 경연에서 강론한 내용을 모아 간행한 책으로, 『고봉집』에 실려 전한다. 『주자문록』은 기대승이 31세인 1557년(명종 12)에 완성한 것으로, 기대승이 『주자대전』을 읽고 중요하다고 생각한 구절을 모은 책이다.
[묘소]
기대승의 묘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기대승은 1590년(선조 23)에 3등수충공성광국공신(三等輸忠貢誠光國功臣)에 녹훈되었고, 1646년(인조 24)에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추증받았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에 있는 월봉서원(月峯書院)은 기대승을 추모하기 위해 1578년(선조 11)에 창건된 서원이다. 1654년(효종 5)에 ‘월봉’이라는 서원 이름을 받았으며,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문을 닫았다가 1941년에 지역 유지들에 의해 빙월당(氷月堂)이 건립되었고 이후 여러 차례 중건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빙월당은 1979년 8월 3일 광주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향사제는 기대승의 학덕을 기리고 추모하는 행사로,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初丁日)에 월봉서원 내 숭덕사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