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촌 양과동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2713
한자 大村良瓜洞契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광주광역시 남구 양과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인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529년 이전 - 대촌 양과동계 설립
최초 설립지 대촌 양과동계 - 광주광역시 남구 양과동 지도보기
성격
설립자 이발|박이온|최용한

[정의]

광주광역시 남구 양과동에 있는 협동 단체.

[개설]

대촌 양과동계는 조선 시대 광주 지역의 양반과 유림들을 중심으로 교화적 사교를 위해 만든 향약계(鄕約契) 성격의 계이다. 1488년~1505년에 완성된 동적(洞籍)을 토대로 중국 진나라의 현이었던 남전(藍田)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본받아 성립된 계다. 초기 계안에 따르면 계의 가입 자격은 인근 30리[11.78㎞] 이내에 거주하는 양인(良人) 이상의 성인 남자로 하였다. 그 결과 경주최씨(慶州崔氏), 장흥고씨(長興髙氏), 함양박씨(咸陽朴氏), 문화유씨(文化柳氏), 광산이씨(光山李氏), 광산김씨(光山金氏), 나주오씨(羅州吳氏) 등 다양한 성씨가 어우러졌다가, 점차 축소되었다.

[변천]

대촌 양과동계의 최초 설립자는 참봉 이발(李潑), 성균진사 박이온(朴以溫), 사헌부 장령 최용한(崔亨漢) 등 11명이다. 이발(李發)의 명단이 초기 좌목(座目)에 등장한 것으로 보아 창계 시기는 늦어도 1529년(중종 24) 이전으로 추측된다. 1980년 이후 이사를 가면 탈계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탈계 때 계비는 반환하지 않는다. 1996년에는 계원 자격이 경주최씨, 장흥고씨, 함양박씨 3성으로 정립된 상태다. 계원의 자격 승계는 장남이 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이자를 받는 식리 활동으로 논을 구입해서 총 6석의 토세를 받고 소작을 주어 재산을 증식하였다. 향약계의 성격으로 계원의 개인적인 부조는 미약하다. 향약의 근본 목적인 향촌 자치와 풍속 교화를 실천하고, 각 계원은 기본적으로 인륜 도덕의 준수와 함께 계에 대한 의무를 진다. 규약을 살펴보면 유교 이념 확립을 위해 조선 초기에 실시된 향약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

해방 전까지 강신(講信), 즉 총회는 연 2회 열었으나, 해방 후 음력 11월 14일 한차례로 간소화되었다. 계회와는 별도로 1800년~1960년 말까지 원근의 유림거사(儒林居士)들을 초대해 매년 1회 시회(詩會)를 열고 와 활쏘기를 하며 교유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해방 직전까지 향음주례(鄕飮酒禮) 또는 향음례라고 하는 정기적인 회합을 매년 초 강신일에 가졌다.

[의의와 평가]

대촌 양과동계가 조선 시대의 향약 시행 초기에 설립되어 수백년 동안 보관해 온 자료는 양과 질 양면에서 큰 의미를 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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