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3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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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儒敎 |
영어공식명칭 | Confucianism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영수 |
[정의]
광주를 비롯한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유학자들에 의하여 형성된 학문적 경향.
[개설]
호남 유학은 사림 정신 발현과 실천적 의리 정신의 표출, 다양한 학파의 공존과 대립, 개혁지향의 실천적 학문관, 문학적 풍모와 예술 정신의 발현, 소통과 개방의 학문관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호남 유학의 정신]
호남 유학은 사림 정신과 실천적 의리 정신을 표방하고 있다.
호남 유학의 실천적 의리 정신은 조선 성리학의 도학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호남 유학이 의리적 실천 정신을 중시한 것은 거듭된 사화로 인하여 이 지역으로 유배된 김굉필(金宏弼)과 조광조(趙光祖)의 영향이 크다. 김굉필은 무오사화로 인하여 순천으로 유배를 오게 되는데, 유배 생활 5년 동안 최산두(崔山斗), 유계린(柳桂鄰), 최충성(崔忠成) 등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으며, 이들에 의하여 도학 정신은 호남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김굉필의 제자들은 현실 비판과 개혁을 지향하면서 호남의 주요 학맥을 형성하였다. 조광조는 기묘사화로 인하여 능주로 유배왔으며,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 정신이 호남 사림에게 영향을 미쳐 의리 실천을 위한 기반은 더욱 확고해졌다고 할 수 있다.
호남 유학의 실천적 의리 정신은 임진왜란 시기에 의병을 통한 실천적인 측면에서 더욱 빛을 발휘하였다.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1533~1592]을 비롯하여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1537~1593], 삼계(三溪) 최경회(崔慶會)[1532~1593], 죽천(竹川) 박광전(朴光前)[1526~1597], 오천(鰲川) 김경수(金景壽)[1543~1621], 도탄(桃灘) 변사정(邊士貞)[1529~1596], 심우신(沈友信)[1544~1593] 등 수많은 의병장이 호남에서 등장하였다.
호남 유학의 의리 정신은 한말(韓末)까지 이어져 기정진(奇正鎭)을 비롯한 노사학파의 위정척사 운동과 호남 의병 활동으로 계승된다. 특히 20세기 초 한말 의병의 중심적 맥락을 형성한 것은 호남 의병이다. 호남 의병들은 기정진과 그의 문인 집단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이들의 의리 정신은 항일 운동과 구국 항쟁으로 이어졌다.
[문학과 예술의 발현]
호남 유학은 유학의 근본 정신을 문학과 예술 영역에서 발현하였다. 호남 유학은 성리학 이론의 탐구보다는 문학에 경도되어 누정을 중심으로 인적 교류를 통하여 문학 활동을 전개하여 한국문학사에 적지 않은 업적을 남겼다. 먼저, 호남의 유학자들 가운데는 탁월한 시적 능력을 발휘한 사람으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눌재(訥齋) 박상(朴祥),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 사암(思庵) 박순(朴淳),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백호(白湖) 임제(林悌), 태헌(苔軒) 고경명(高敬命) 등이 있다.
또한, 호남의 유학자들 가운데 문인화가로서 예술적 재능을 선보인 사람들이 있다. 조선 전기의 화풍을 보여주는 산수도를 그린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1480~1545] 은 문인화가로 이름을 남겼으며, 최명용(崔命龍)도 절파계(浙派系) 소경산수인물화풍(小景山水人物畵風)을 따른 것으로 평가받는 「선인무락도(仙人舞樂圖)」를 남겼다. 특히, 문인화가로서 두드러진 업적을 남긴 인물은 정선(鄭歚)과 심사정(沈師正)과 함께 조선 후기 삼제(三齋)로 일컬어지는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이다. 윤두서는 당쟁이 심화되어 벼슬을 포기하고 고향인 해남에 은거하면서 선비 화가로서 많은 미술 작품을 남겼다. 윤두서의 그림은 조선 중기의 화풍을 바탕으로 하여 전통성이 강한 화풍을 지녔으며,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과 풍속화의 선구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