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3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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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馬韓 |
영어공식명칭 | Maha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 |
집필자 | 이병호 |
[정의]
전라북도 익산 지역에 있었던 삼한 시대 고대 정치 연맹체.
[개설]
마한, 진한, 변한을 뜻하는 삼한(三韓)은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 경까지 한반도 중남부 지역의 정치 집단을 가리킨다. 마한의 성립이나 멸망 시기에 관하여서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익산 지역의 경우에는 기원전 3세기 경에서 기원후 4세기 후반 단계까지를 마한으로 설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마한의 성립과 생활상]
마한은 삼한 중 가장 큰 세력을 이룬 나라였다. 마한에는 54개의 소국이 있었는데, 큰 나라는 1만여 가(家),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 모두 합하여 10여만 호(戶)가 되었다고 한다. 마한은 한강 유역에서 금강 유역과 호남에 이르는 지역을 중심으로 번성하였다. 이 지역은 주변 지역과의 교통이 편리하고 물산이 풍부하였다. 삼한을 이루고 있던 소국들은 고조선 지역에 설치된 중국 군현의 통치 단위인 현(縣)에 비교될 수 있으며, 영역상 현재의 군(郡) 정도의 면적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마한에 속한 여러 소국들의 대표자는 목지국(目支國) 진왕(辰王)이었다. 진왕 중심의 마한 소국 연맹체는 상대적으로 토착성이 강하고, 성립 시기가 빠르다. 하지만 『삼국지』의 “진왕은 스스로 왕이 될 수 없다.”라는 기록에서 나타나듯 마한 전역을 포괄하는 강력한 연맹체 수준으로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목지국의 위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청동기와 초기 철기 유물이 상대적으로 풍부하게 발견되는 익산 지역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삼한은 기름진 토지 덕분에 조, 보리, 콩, 밀 등 밭에서 나는 작물을 고루 기를 수 있었다. 또 농사짓기에 적절한 기후와 토양이 있어 벼농사도 발달하였다. 씨앗을 뿌리는 5월과 가을걷이를 하는 10월 두 차례에 걸쳐 귀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중국 사람들이 흔히 추는 탁무(鐸舞)와 비슷한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당시의 농기구는 돌로 만든 돌칼이나 돌낫은 사라지고, 쇠로 만든 손칼과 낫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쇠로 만든 따비와 괭이가 있어 땅을 파거나 흙을 고르는데 사용하였고, U자형의 삽날을 나무 자루에 끼워 사용하는 가래와 철제삽을 사용하여 농업 생산력을 높일 수 있었다.
[익산의 마한 문화]
한편 고고학적 측면에서 익산 지역 마한의 문화는 크게 4단계로 나누어 설명되고 있다. 먼저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의 조기 단계이다. 익산 다송리, 용제리, 평장리, 신동리의 유적 등이 조기 단계에 해당되는데, 일반적으로 세형동검과 청동거울, 의기화된 청동기와 함께 주조철부(鑄造鐵斧)를 비롯한 철기가 공존하며, 흑도장경호(黑陶長頸壺)와 점토대토기가 부장된다. 이러한 현상은 함평 초포리나 화순 대곡리, 장수 남양리 유적의 문화상과 비슷하다. 특히 신동리 유적의 널무덤[토광묘(土壙墓)]에서는 세형동검과 함께 철기 유물이 함께 발견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고조선 준왕의 남천 기록과 연관되어 익산이 마한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는 배경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기는 기원 전후부터 3세기까지로 마한 지역 전역에서 주구묘(周溝墓)가 축조되는 시기이다. 주구묘는 매장 주체를 중심으로 그 둘레에 도랑을 판 형태의 무덤을 가리킨다. 주구묘는 군집 양상이나 평면 형태 등에서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데 익산의 경우 영등동 유적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주구묘 축조 전통은 익산이 백제로 편입된 이후에도 이 지역의 중요한 묘제로 오랫동안 남게 된다.
3세기부터 4세기 전반의 중기 단계에는 장타원형이나 사다리꼴, 긴 삼각형 등 다양한 형태를 가진 분구와 방형의 낮은 저분구가 축조된다. 하나의 분구 안에 널무덤과 옹관 등이 함께 배치되는 다장(多葬)이 이루어지는데, 익산 율촌리 유적이 대표적이다.
후기는 4세기 전반에서 5세기 후반까지로 평면 형태가 커지고 정형화되며, U자형의 전용 옹관이 주로 매장된다. 나주 신촌리나 복암리 등 영산강 유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익산 지역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익산 지역이 이미 백제 중앙 세력 영향권에 편입되었음을 의미한다. 다만 간촌리 유적은 분구묘이지만 주구 안에서 금강 하구의 고분에서 주로 발견되는 5세기 대의 굽다리접시[고배(高杯)]가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이는 익산에서 오랜 기간 마한의 전통을 가진 무덤이 축조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