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3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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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時代 |
영어공식명칭 | Goryeo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권익산 |
[정의]
918년에서 1392년까지 고려왕조가 통치했던 시기의 전라북도 익산 지역 역사.
[개설]
고려 시대 익산 지역에는 금마군(金馬郡), 낭산현(朗山縣), 옥야현(沃野縣), 여양현(礪良縣), 함열현(咸悅縣), 풍제현(豐堤縣) 등의 군현들이 전주의 속현으로 존재하였다.
[고려 시대 익산 지방의 변천]
고려 시대의 속현은 수령이 파견되지 않았기에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고려사(高麗史)』 등 기록에 남아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낭산현과 옥야현은 1176년(명종 6) 잠시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다시 전주에 속하도록 하였고, 여량현은 1391년(공양왕 3) 감무를 두어 낭산현을 겸임하게 하였다. 원나라 순제(順帝) 황후 기씨(奇氏)의 어머니가 익산이씨 이행검(李行儉)의 딸이었는데 금마군이 외가 고을이라는 이유로 충혜왕(忠惠王) 복위 5년인 1344년 익주(益州)로 승격시켰다.
고려 시대에는 향, 부곡, 소와 같은 특수 행정구역이 있었는데 익산에서 대표적인 곳이 도내산은소(道乃山銀所)이다. 도내산은소는 지금의 용안면 용두리 일대로 보이는데 조선 시대까지 은이 생산되었다. 1321년(충숙왕 8) 도내산은소 출신인 바얀부카[伯顔夫介]가 원나라에 있으면서 고려를 위해 공을 세워 도내산은소를 용안현(龍安縣)으로 승격시키고, 1391년(공양왕 3)에는 풍제현을 용안현에 합쳤다.
고려 시대에도 익산은 교통의 중심지였다. 전공주도(全公州道)에 속한 21개 역참 중 두 곳이 익산 지방에 있었는데 금마의 채평역(彩平驛)과 함열의 재곡역(材谷驛)이다. 1012년 거란의 침입으로 현종이 나주로 피신할 때에는 여량현을 거쳐 갔다. 지금은 백제 무왕의 능으로 밝혀진 익산 쌍릉은 고려 시대에는 마한의 조상 무강왕(武康王)의 능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익산 쌍릉이 1329년(충숙왕 16) 도둑에 의해 도굴되는 일이 있었다.
[익산과 관련된 인물]
국자감 전주를 지낸 이행검이 형부(刑部)의 전법랑으로 있을 때 충렬왕의 원비인 정화원주(貞和院主)가 백성을 노비로 삼으려고 하자 백성이 소송을 걸었다. 임금의 명령 때문에 다른 관리들은 소송의 정당한 쪽을 패소시키고 백성을 정화원주에게 노비로 주려고 하였지만 이행검은 죽기를 각오하고 아니 된다며 반대하여 강직한 행정으로 칭송을 받았다. 이행검의 외손녀가 원 순제의 황후 기씨이다.
이행검의 손자인 이공수(李公遂)는 홍건적의 침입으로 황폐해진 개경을 복구하는 데 기여하였고, 1363년 원나라가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려하자 원나라 황실을 설득하여 공민왕을 복위시키려 노력하였으며, 최유가 대규모 병력으로 고려를 공격하려 하자 이를 공민왕에게 알려 대비하도록 하였다. 이공수는 기황후의 외사촌 오빠이므로 원에 있을 때 원의 황실과 교류하였는데, 원의 순제로부터 태자의 외가에 현명한 이는 이공수 한 사람뿐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귀국하는 길에는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제값을 주고 사용하여 깨끗하고 맑으며 삼가고 신중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신돈이 권력을 잡은 후 관직에서 물러나 익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조선의 기틀을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권근이 1390년(공양왕 2) 익산 지역으로 유배를 왔다. 조선의 성리학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입학도설』을 익산에 있는 동안 지었다.
[진포대첩과 익산]
고려 말 왜구들이 해안 지역은 물론 내륙 깊숙한 곳까지 침입하여 백성을 잡아가고, 곡식을 약탈하였다. 예로부터 익산 지역은 금강과 만경강 사이에 너른 평야가 펼쳐진 비옥한 곡창지대였으며, 가까운 군산에 진성창이 있어 자주 왜구의 침입을 받았다. 1380년 금강을 따라 500여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온 만여 명의 왜구가 침략하였다. 왜구들은 강가에 배를 정박하고 익산을 비롯한 금강 연안의 고을을 약탈하였는데 왜구의 노략질로 산과 들에 시체가 뒤덮었으며, 곡식을 나르다 흘린 것이 1척 높이가 될 정도였다. 이에 고려 정부는 심덕부, 나세, 최무선이 이끄는 함대로 하여금 물리치게 하였다. 최무선이 화통도감을 중심으로 개발한 화포로 무장한 고려군이 금강 연안에 정박한 왜구의 배를 모두 격침시켜 대승을 거두었다. 이것이 진포대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