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6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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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公遂 |
영어공식명칭 | Lee Kongsoo |
이칭/별칭 | 남촌(南村),문충(文忠)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류호석 |
출생 시기/일시 | 1308년 - 이공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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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340년 - 이공수 예부시 장원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341년 - 이공수 전의주부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346년 - 이공수 감찰대부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348년 - 이공수 판밀직사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350년 - 이공수 정당문학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363년 - 이공수 영도첨의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366년 - 이공수 사망 |
출생지 | 익산 - 전라북도 익산시 |
부임|활동지 | 개경 - 개경직할시 |
묘소|단소 | 개풍 - 개성직할시 개풍군 |
사당|배향지 | 화암서원(華巖書院)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익산(益山) |
대표 관직 | 판밀직사사|정당문학|영도첨의 |
[정의]
고려 후기 익산 출신의 문신.
[가계]
이공수(李公遂)[1308~1366]의 본관은 익산(益山)이고 자는 남촌(南村),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인종 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낸 이주연(李周衍)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상서좌복야 이주(李湊)이고, 할아버지는 언부전서(讞部典書)를 지낸 이행검(李行儉)이다. 아버지는 감찰규정(監察糾正)을 지낸 이애(李崖)이다. 이공수의 고모가 기자오(奇子敖)와 결혼하여 후일 원나라의 순제(順帝) 왕후(王后)가 되는 기황후(奇皇后)를 낳음으로써 가문의 세력이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활동 사항]
이공수는 1308년(충렬왕 34) 익산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어머니가 사망하여 매부인 재상 전사의(全思義)의 집에서 자랐다. 1340년(충혜왕 복위 1) 감찰규정으로 있으면서 예부시(禮部試)에 장원급제하였으며, 1341년 전의주부와 성균관직강이 되었다. 1342년 성균사예·예문응교, 1343년 전교부령·춘추관수찬관 등을 역임하였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 밀직사우부대언, 예문관직제학으로 승진하였으며, 1345년 지신사를 거쳐 겨울에 전리판서로 옮겼다가 1346년에 감찰대부로 승진하였다. 1347년에 밀직부사에 임명되었고, 1348년에는 광정대부(匡靖大夫) 판밀직사사로 벼슬이 올라 4월에는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1350년(충정왕 2)에 정당문학에 임명되었다.
이공수는 1352년(공민왕 1) 첨의평리, 삼사우사 등을 지내다가 1353년 찬성사로 승진하였다. 1355년에는 지공거가 되어 예부시를 주관하였으며, 공민왕이 이공수를 불러 동성도사로 삼았으나 곧 사퇴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361년 홍건적이 침입하자 이공수는 평장사(平章事)로 전장에 나가 진을 쳤으나, 적이 개경을 압박하자 다시 돌아와 왕을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였다. 1362년 홍건적이 평정되자 다른 관료들과 함께 개경을 지켰다.
1363년 원나라에서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세우자, 이공수는 밀직제학 허강(許綱)과 함께 진정표(陳情表)를 가지고 원나라에 가서 공민왕의 복위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원나라에 머물렀다. 3월에 고려 조정으로부터 좌정승에 임명되었지만 통역관 이득춘(李得春)이 이공수가 덕흥군의 우정승에 임명되었다고 무고하는 바람에 파직되었다. 이후 이득춘의 참소가 사실과 다른 것으로 밝혀져 이공수는 영도첨의에 제수되었으며, ‘추충수의동덕찬화공신(推忠守義同德贊化功臣)’이라는 호를 받았다. 공민왕의 왕위가 회복되자 이공수는 고려로 귀국하였다.
귀국한 이공수는 정권을 잡은 신돈(辛旽)이 시기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지금의 개성직할시 개풍군 지역인 덕수현(德水縣)에서 한가롭게 지냈다. 1365년에 익산부원군(益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966년 사망하였다.
[묘소]
이공수의 묘소는 북한 개성직할시 개풍군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이공수는 1365년에 익산부원군(益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사망한 뒤인 1376년(우왕 2) 공민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배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