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074 |
---|---|
한자 | 九政- |
이칭/별칭 | 구정배리,구정베루,구정탄(九政灘) |
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지명/자연 지명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진암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진식 |
[정의]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진암리 사곡마을에 있는 벼랑.
[명칭유래]
구정벼루는 구정과 벼루로 나뉜다. 구정의 어원은 분명하지 않은데, 구정벼루를 비롯하여 구정골·구정들·구정목·구정봉 등에서 보듯 지명의 전부 요소로 비교적 적극적으로 쓰인다. 뜻은 대체로 아홉 개의 샘[九井], 아홉 개의 정자[九亭], 구정[좌우 양쪽에 폭이 넓은 줄을 걸고 한쪽에 열여덟 사람씩 두 줄로 메는 큰 상여] 등으로 보고 있다. 벼루는 ‘강가나 바닷가에 있는 벼랑’을 뜻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배리·베루 등으로도 나타난다. 전국적으로 베루산이 많이 발견되며, ‘벼랑이 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과거 구정벼루는 청원군 북이면 화상리나 석성리 사람들이 땔나무를 해서 지고 지나던 길이었다. 길이 좁고 울퉁불퉁한데다가 밑으로는 수심이 깊은 미호천(美湖川)이 흐르고 있어 매우 위험한 곳이었다. 이런 좁은 길임을 고려한다면, ‘두 줄로 메는 상여가 겨우 다닐 수 있는 벼랑’이라는 뜻이 타당할 듯하다. 강원도 영월군 중동면 직동리에 있는 구정배리에 대해서도 벼랑이 구정 곧, 상여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한다. 구정베루나 구정탄(九政灘)으로도 부르는데, 구정탄은 구정을 구정(九政)으로 한자화한 지명이다.
구정벼루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지명 전설이 전해 온다. 조선 성종 때 이곳에 마음씨 착하고 청빈한 이 처사(處士)가 살고 있었는데, 구차한 살림에 쉰이 넘도록 슬하에 자식 하나 없어 초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느 동짓날 눈보라가 치는 추운 밤이었다. 이 처사 내외는 오직 슬하에 자식이 없어 선조의 향화(香火)를 끊게 되었음을 걱정하면서 서로 위로하고 잠이 들었다.
이 처사는 꿈속에서 “사람 살려 주시오.” 하는 소리가 들려 방문을 열고 보니, 한 걸인이 눈을 맞으며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이 처사는 부인을 시켜 아랫목에 이불을 깔고 걸인을 눕게 하였다. 그런데 등잔불에 비친 걸인의 모습을 보니 얼굴과 목에 종기가 많이 난 문둥이 형상이었다. 부인이 좁쌀로 밥을 지어 걸인을 대접하니, 걸인은 밥그릇을 비우고 누웠다가 이 처사가 잠이 들려고 할 때 목욕물을 부탁하였다. 이 처사는 물을 데우고 걸인의 부탁으로 등까지 밀어 주었다. 그때서야 걸인은 이 처사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며 먼저 방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이 처사가 아무리 기다려도 걸인이 방으로 들어오지 않아 부엌으로 나가 보니 걸인은 간 곳이 없으며 사립문 밖에 쌓인 흰 눈 위에도 발자국이 없었다. 이 처사 내외는 할 수 없이 방으로 들어와 늦은 잠자리에 들어, 이튿날 날이 밝았을 때도 깊이 잠들었고, 두 사람은 같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이 처사님!” 하고 부르는 소리에 문을 열고 내다보니 웬 백발노인이 “그대들은 죽어 가는 사람을 살려 큰 덕을 베풀었으니 내일 도봉산에 올라 목욕하고 천제를 지내면 옥동자를 낳아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다.” 하고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꿈에서 깬 이 처사 내외가 백발노인의 말대로 하니 과연 몇 달 뒤 부인에게 태기가 있어 드디어 옥동자를 낳았다. 이후 아들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다. 이후 이 처사 집안에서는 대대로 아홉 정승이 나왔고, 이로 인해 구정벼루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리고 구정벼루 옆에 있는 마을 이름 또한 구정벼루라 한다.
[자연환경]
아홉 개의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고 앞에는 미호천이 흐르고 있다.
[현황]
구정벼루는 봄가을에 소풍객과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미호천 위에 예전에 놓은 여암교(呂岩橋)가 있고, 바로 남쪽에 새로운 여암교가 놓여 있다. 예전에는 벼랑을 따라 작은 길이 나 있어 위험하기는 해도 나무꾼들의 왕래가 있었으나 지금은 길도 찾을 수 없을 정도여서 사람의 왕래가 뜸하다.